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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Sep 10. 2023

백록담 남벽

토요일을 지키는 방법

한라산은 저를 시험합니다. 그래서 시험 보러 갑니다. 이번에는 시험도 보고 중요한 결단을 내렸고, 경계를 그었습니다. 2023년 9월 9일 토요일을 꽉 채운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한라산 당일 쏠로 산행에 관한 글을 올리기 훨씬 전, 친구들과 가기로 한 제주도 여행 일정이 있었어요. 하지만 사는 게 계획대로 되지는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혼자 남겨지게 되었어요. 그냥 취소할까. 아니, 혼자 가기로 합니다. 친구들과는 사려니 숲길을 걷기로 했었지만, 혼자니 산행으로 정합니다.


아직 덥지만 쨍쨍 하늘과 직접 맞짱을 떠야 하는 곳을 택했어요. 죽자, 죽어! 그리곤 장비 점검을 합니다. 사실은 살아 돌아오고 싶어. 영실 탐방로를 가야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숲길이 길게 나 있는 돈내코 탐방로를 가고 싶었지만, 지난 3월 가보니 그늘이 많은 진한 회색의 숲길이 조금 무서웠어요. 사람이 무서워요. 30년 후 백골시체로 발견되기 싫어요.


남편이 '나 한번 가볼까'합니다. 제가 신나서 엎어졌습니다. 오호라, 돈내코를 가야겠다.




3시 40분에 기상, 필사 업로드, 안전 장비, 상비약을 챙기고 김포 공항으로 갑니다. 라라크루 캡틴의 오늘도 해가 뜹니다 메시지가 톡방에 울립니다. 김포 공항 창밖 이슬에 무작정 퍼져있는 해로 답톡합니다. 행복한 토요일 보내겠습니다.

주차장에서 돈내코 탐방로 입구까지 가려면 충혼묘지라는 공동묘지를 지나갑니다. 그 중간에는 시멘트로 난 오르막길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계급을 나누는 듯 단단하고 뜨거운 그 길이 힘든 산행의 시작입니다. 그 오르막길 끝에 관리사무소가 있고, 왼쪽으로 휘돌으면 숲길 입구가 있습니다.


검게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운 숲길의 시작에 남편이 겁을 먹었나 봅니다. '이런 곳에 혼자 왔던 거야?'

조용히 숲을 덮고 있는 이끼가 무서웠어요. 나무마다 돌마다 만지면 밟으면 가만 안 두겠다는 의지를 공포스럽게 느꼈어요. 조심조심 돌길을 밟으며 올라갑니다. 남편이 아무 말도 없이 올라갑니다. '힘들면 말해줘요. 우리 남벽까지 가지 않아도 돼요.' 아무 말없이 올라갑니다.

지난 3월에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던 둔비바위를 찍었어요. 노란 들꽃도 예쁩니다. 이름을 모르니 제게는 그냥 한라산 들꽃이네요. 라라크루에는 꽃을 올리시는 작가님도 계시니 그분은 아실까 생각이 지나갑니다.


남편의 표정이 제게 익숙하지 않아요. '우리 내려가도 돼요. 내려가서 예쁜 카페에서 차 마시며 이야기해도 좋잖아요. 제주에 예쁜 카페 많아요.' 얼마간 생각하는 듯하더니 숲길이 끝나는 곳까지만 가보겠다고 하더군요. 평궤대피소에서 남편이 쉬기로 하고 저는 혼자 남벽을 향해 걸었어요. 남벽 1.7km 전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늘이 뚫리는 다소 쉬운 평지길이 시작되는데,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무리해서 다녀오면 내려갈 때 고생하게 됩니다. 시간을 재며 다녀오라는 남편의 말에 빨리 걸음을 재촉했어요. 돌길이 힘들어요.

탐방로 입구와 달리 바람에 춤추는 진한 회색 구름이 산을 덮습니다. 제주에 도착해서 본 한라산 정상을 둘러싼 그 구름일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구름 속에 있구나.


차가운 잔 안개들이 얼굴을 스칠 때 정말 기분이 좋아요. 한라산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는 거니까요. 남벽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 괜찮아, 그래도 남벽은 거기 그대로 있는 거니까. 야생화를 지나며 마음을 달랩니다. 620미터, 조금만 더 힘내자. 곧 남벽이야.

남벽을 290미터쯤 앞두고 경이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파란 하늘이 빼꼼 드러나고 있어요. 오, 한라산이 저에게 남벽을 보여주려나 봅니다. 오, 마이 갓! 드디어 남벽을 봅니다. 제게 힘을 주는 남벽, 다시 계속 힘내라고 남벽이 저를 다독여주고 있습니다. 남벽의 바위 하나하나 눈에 담아 힘을 모읍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계속 뒤돌아보며 아쉬운 남벽을 눈에 넣습니다. 구름이 남벽을 다시 가져가고 있어요. 진해지는 구름들이 얼굴을 휘돌아, 남편을 찾으러 평궤대피소로 내려가는 제 걸음을 응원합니다. 해가 쨍쨍했으면 힘든 길이 었겠지만 오히려 구름이 많아 시원하게 고맙게 내려갔습니다.


돌길을 내려갈 땐 조심해야 합니다. 무겁게 디디면 다치기 쉬워요. 앞에 놓인 돌들의 높이와 각도를 예상하면서 춤추듯 걸어야 안전하고 즐겁습니다.

흔들흔들 돌을 밟으며 내려오면서 제 마음의 돌도 내려두기로 합니다.


돈내코 탐방로는 혼자 오지 마라는 남편에게, 오고 싶을 땐 산행 친구를 구할 때만 오겠다고 했어요. 올해까지만 한라산 가고 내년부터는 자기와 다른 산에 다니자고 합니다. 서운함에 눈이 뜨거웠어요. 빔 쏴서 날려줄까.


이런 말을 듣는 토요일이라니, 마음의 정리를 해야 했어요. 오래전부터 토요일은 각자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지내기로 했는데, 이거 뭐지? 그런 생각이요.


기억나죠? 우리 이러기로 했잖아요. 한라산은 제게 특별해요. 저를 시험하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합격을 기원하는 그런 힘을 주는 곳이에요. 당신은 당신 산을 다니고, 저는 제 산을 다니겠어요. 토요일은 온전히 제 거잖아요.


제 남편, 2023년 9월 9일 토요일부로 제 남은 인생의 토요일에서 튕겨 나가는 행운을 누립니다. 지금은 서운할지 몰라도 그게 행운이고 삶의 즐거운 자유와 여유란 걸 곧 알게 될 거예요.


어제를 남편과 저의 토요 독립기념일로 지정합니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서귀포 바다 한쪽과 구름을 담습니다. 정리된 마음을 다시 다독이는 것도 해야 합니다. 김포에 밤 9시 50분에 연착하여 집에 도착하니 11시 30분입니다. 한라산에 다녀오면 하루 3만보는 넉히 걷습니다.


저의 몸과 마음을 시험하고 싶을 때, 살아갈 힘이 필요할 때, 한라산 남벽을 보러 갑니다. 앞으로도 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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