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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lotte Jan 15. 2022

겨울이 오면

해가 짧은 겨울에는 쉽게 볼 수 없는 순간이다. 침실로 들어오는 햇빛이 식물들에게도 나에게도 귀한 시간. 베란다와 거실에 주로 있던 식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이사 오기 전부터 이 집을 정글로 만들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 현실적인 부분들로 인해 무산이 됐다. 5년 전이었나, 그때도 이사를 간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삭막한 원룸을 생기 있게 꾸미고 싶어서 처음으로 화분을 길렀었다. 키우기 까다로운 식물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말라서 죽어버렸다. 아직까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추측해보자면 해충이 생겼던 게 아니었을까


그 시즌엔 이상하게 모든 것들이 그랬다. 별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일상에 온갖 변수들이 생겨서 갑작스럽게 많은 것들이 변했고, 적응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나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숨기 바빴다. 내가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자존감이 밑바닥에 있을 때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려 다녔을 뿐.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을 때 남은 숨을 토해내며 나는 다시 일어섰다. 그렇게 또 여러 계절을 겨우 버텨내고 제일 좋아하는 봄,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집주인 분에게 양해를 구해서 이사 오기 한 달 전부터 비어있던 이 집을 정말 문턱이 닳듯이 다녀가며 어떻게 채워나갈지 행복한 고민을 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계획부터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터라 누구도 볼 일이 없는 문서까지 만들어 가며 공을 들였다. 꼭 행복해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노력이었달까. 그렇게 애정을 듬뿍 담은 집에 이사 가기 전날 밤엔 설레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잠을 못 이뤘다. 마냥 좋기만 할 것 같았는데 괜히 아쉬워져서 자꾸 여기저기 들여다보게 됐던 걸까. 많은 추억과 사건 사고가 있었던 공간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더 새로웠나 보다.


자취 10년 차인 나에겐 혼자만의 의식? 같은 게 있는데, 살았던 집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서 있었던 추억들을 되새겨 보고 그래도 덕분에 잘 살았어, 고마워, 하고 인사하는 것이다. 사실 이건 내가 하면서도 오글거리는데, 마지막은 항상 아쉬운 법이라 나중에 후회할까 봐 꼭 마음속으로 하고 나온다. 아프고 힘들었던 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정도는 미화되기 마련이기 때문일까, 시원섭섭다하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눈 옛집을 뒤로 한채 계단을 내려갔다. 맥시멀 라이프를 꿈꾸는 집순이의 짐답게 정리하기도 힘들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트럭에 빼곡히 실려있는 걸 보니, 겨우 담긴 짐처럼 정말 아등바등 열심히도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숨 돌리고 출발한 트럭 안의 공기는 어색했지만 초면이 아닌 기사님과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수다를 떨다 보니 금세 서로의 안녕을 바라 주는 훈훈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즈음에 피로가 싹 가시는 풍경을 마주했다. 아, 봄에 이사하길 정말 잘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벚꽃길이었다. 강인지 바다인지도 모를 만큼 넓은 물결 옆에 자리한 벚꽃나무라니, 내가 부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이사를 끝낸 지 10개월 차, 생각보다 춥지 않은 겨울에 감사하며 초록이들과 아주 잘 지내고 있다. 몇몇 아이들은 곧 다가올 한파와 꽃샘추위가 걱정되긴 하지만 있는 힘껏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애정을 줄 예정이다. 초록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부디, 이번에도 활짝 핀 벚꽃을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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