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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희윤 Oct 30. 2022

조용히 망하기

이미 비용은 치러졌다

헌책방에서 들은 일갈


사업이 기울어갈 무렵, 헌책방을 찾았다. 새 책을 구매하는 비용마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부담스러운 것은 비용만이 아니었다. 대형 서점의 경제경영 및 자기계발 평대에서 으레 만날 수 있는, 성공을 외치는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성공은 더 이상 나와 관계없는 얘기였고, 이제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리를 식힐 책이나 한 권 주워갈 요량이었는데, 처음 보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침묵의 기술>이란 책으로, 18세기의 어느 사제에 의해 쓰여진 내용이었다. 머리말을 읽는 순간,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일찍이 오라토리오 수도회 소속 라미 신부가 자신이 쓴 책 『말하는 기술』을 르카뮈 추기경에게 바치자, 추기경은 답례 인사 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두말할 필요 없이 훌륭한 기술이긴 하오. 그런데 침묵하는 기술은 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겠소?”

조제프 앙투안 디누아르 <침묵의 기술>, p10


말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은 많지만, 침묵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은 없다. 성공을 말하는 책은 많았지만, 실패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


할 말이 많았다. 실패에 대한 분노, 좌절, 두려움 등. 원망할 대상도 많았다. 몰래 바가지를 씌워온 거래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공장 사장님, 물량으로 우리 납기를 찍어누른 대기업까지. 심지어 갑자기 구매가 뜸해진 고객이나 매출을 방해하는 궂은 날씨, 대체공휴일과 이를 제정하는 정부 관계자들까지 야속했다. 다 부질없는 일이며, 내가 충분히 영리하지 못했고 그들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망해가는 상황에서 '남 탓'의 유혹은 강렬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내면에서 들려오는 자기연민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주변의 지인들은 모두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 같았고, 나는 더 이상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어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고, 자존심도 박살난 마당에 내 처지에 대해 신세한탄을 쏟아낼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이다.  


첫 번째 원칙.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여섯 번째 원칙. 사람은 침묵 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 밖으로 넘쳐나게 되고 말을 통해 흩어져,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중략)

결단코 침묵을 허물지 말아야 할 인생의 길목들을 파악하는 것. 일단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는 모든 대목에서 변치 않는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

조제프 앙투안 디누아르 <침묵의 기술>, p20


200년을 건너 한 사제로부터 들은 일갈이었다. 성공에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말하는 기술이라면, 망해가는 상황에서는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패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사람을 일시적으로나마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 겸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은 침묵이기 때문이다. (커버 이미지는 그가 지냈던 수도원이다.) 이후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단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법을 배웠다.


성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망하는 일도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하나의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침묵 vs 남 탓 또는 신세한탄'의 옵션에서 언제나 침묵이 더 나은 선택이다. 특히 망해가는 상황에서 침묵은 항상 더 나은 가능성을 열어준다. 


침묵을 함으로서 당신은 실패를 통해 무엇을 가져갈지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남 탓이나 신세한탄을 하면 잠시 동안은 기분이 나아지겠지만, 사제의 말처럼 이는 결국 자아를 얄팍하게 만든다. 얄팍해진 그릇으로는 실패는 물론 그 무엇도 담아갈 수 없다. 잘 망하는 일은 그걸로 끝이다. 


누가 내 비용을 치렀을까


앞 글 <왜 나는 너를 두려워하는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두려움에 휩싸였던 건 처음으로 무언가를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패가 성립하려면 지불한 것이 있어야 한다. 당신은 몇 년 간의 고생스러운 시간을 각오했을 수도 있고,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왔거나 수 억에 달하는 돈을 투자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비용은 언제나 선불이다. 결과를 알기 전에 이미 치러졌다는 것이다. 즉, 돌이킬 수 없다.


결과가 성공적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만, 문제는 실패했을 때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사람들은 대개 비용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1. 비난의 대상을 찾고, 비용을 전가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내부적으로 비난의 대상은 무능한 의사결정권자, 아이디어의 원흉(한때는 기발하다는 찬사를 받았을), 불성실한 동료 등 무궁무진하다. 외부적으로는 무책임한 협력업체, 종잡을 수 없는 트렌드, 변덕스러운 고객과 날씨까지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그렇게 해서 실패가 '없던 일'이 되고 누군가가 모든 비용을 대신 치러준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즉, 아무 의미 없다.


2. 비용에 집착하고, 자신도 함께 매몰된다

더 중독성 있는 방법이다. 무엇을 얼마나 잃었는지 무의미한 계산을 반복하면서, 일을 해결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숨을 수 있다. 혹은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쏘아대며, 스스로 책임감 있고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때아닌 우월감마저 느낄 수 있다. 여기서 그나마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이 정도만 망해서 다행이다'라는 자기위안이나, '나는 망했지만 남 탓은 하지 않았다'는 정도의 안도감 뿐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우리가 도전할 수 있던 이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의 비용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에 따르는 비용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리스크를 떠안을 것이고, 당신은 어떤 경쟁이든 참여할 엄두조차 안 났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절묘하게 수요와 공급, 경쟁과 리스크를 조정하며 시장의 균형을 유지해나간다. 그리고 비용을 치르고 그 시장에 뛰어든 것은 우리 자신이다.


비용을 받아들이자. 자본주의 시스템의 좋은 점은, 비용을 지불했다면 무엇이 됐건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라는 비용을 지불한 당신이 분명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많다. 하지만 이 비용을 회피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다면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진다. 


이미 비용은 치러졌다. 침묵으로써 우리의 그릇을 깊고 단단하게 준비하고, 우리가 마땅히 가져가야 할 것들에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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