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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스 Oct 21. 2021

신영복_<강의> 동양고전의 재조명

감옥의 사상

 이 책은 중간에 3번은 포기한 후에야 마침내 완독한 책이다. 어떤 책을 중간에 포기하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책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될 때, 작가가 너무 나랑 사상이 안 맞을 때이다. 소설의 경우 재미가 없어서 포기한 적도 간혹 있다. 이 책은 이해가 안 돼서 읽기를 그만두었던 책이다. 책은 총 11챕터로 되어 있는데 그 중 3장 주역 때문이다. 3장부터 주역이라니 너무 초반에 어려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재미없다. 나는 세상에 책은 참으로 많기 때문에 굳이 이해가 안 되는 걸 읽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난 동양철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우리 큰집은 명절이면 남자, 여자 밥상을 따로 차렸다. 여자들은 아래쪽 작은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나보다 5살 어린 남자사촌동생은 절을 했고 나와 동생은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큰 아빠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요즘 여자애들도 그렇게 담배를 피운다며 이것은 세상말세라고 했다. 나는 그 정도가 세상 말세라면 세상은 없어지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건 나는 그쪽 계열이 싫다. 동양철학=유교가 아니며, 유교의 본질이 남녀 밥상을 따로 차리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지만, 이미 싫어지게 되어 버린 것들이 있다. 그리고 선입견은 어떤 책에는 동기부여로 작용하지만, 어떤 책은 읽기 싫게 만든다. 독서는 저자에서 독자로 향하는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의 경험, 선입견, 인식틀과 저자의 그것들이 오가는 과정이기에, 누구는 감탄하며 읽을 책도 누구는 ‘그래 공자, 맹자같은 소리구나.’ 하며 읽는다.


그런데 다시 이 책을 펼쳐든 이유가 있다. 이 책이 나에게 특별해서 꼭 읽어내고 말겠다는 다짐 같은 건 없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신영복’이란 이름을 보았을 뿐이다. 나는 그를 잘 몰랐지만 알고 보니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실 처음 이 책을 구매한 것도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라는 책에서 유시민이 전략적 독서목록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보다가 알았지만 신영복은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저서 중 유명한 것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의 사상이다.
1968년부터 20년 20일 동안 ‘엘리트 사상범’은 ‘밑바닥 인생들’과 살면서 그들과 자신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그는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없었지만, 타인을 타자로 만들지 않고도 남성이 된 드문 인간이 되었다. 천만 번의 외로움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은 그를 타인을 타자로 만들지 않고도 남성이 된 인간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꽂혀 버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을 타자로 만들며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다. 내가 설 곳만 넓어질 수 있다면 타인은 들러리가 되어도 상관없다. 아니 들러리로 만드는 정도만 되어도 나같은 들러리 인생들은 감지덕지 살 것이다.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면서까지 자기 땅을 넓히려는 자들이 너무 많다. 권력 있는 자일수록 타인을 타자로 만들기 쉬운 법이다.

    

그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한마디로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보낸 것이다. 사회주의 책을 읽고 학생운동을 하면 감옥에 다녀오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대였다지만, 20년은 너무 길지 않나. 20대 청년은 40대가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왔다.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을지 상상이 안 되는 시간이다. 이제 나에게 새로운 선입견이 생겼다. 이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3장 주역을 패스하고 4장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우리가 이름은 들어본 동양고전 대부분을 다룬다. 유명한 공자, 맹자를 비롯하여 노자, 장자, 다소 생소한 묵자, 순자까지 다루고 있다. 당연히 깊이 다루지는 않으며, 그 덕에 나 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책은 그저 공자와 맹자의 사상에 대해 설명해주는 식으로 가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현대에의 적용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하는데, 그렇게 읽히는 그에게서 내가 읽은 것은 진정성이다.

 


     

개인적인 것이지만,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재미있다. 주역도 주역이지만 책의 초반에 공자, 맹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주류는 공자, 맹자다. 우리가 한마디라도 더 들어본 것들이 주류다.

비주류는 생소한  이름이다. 비주류가 비주류인 증거는 들리지 않았다는 데 있기에 그렇다. 책에서 가장 생소한 사상가는 묵자다. 묵자는 오늘날로 치면 사회주의를 떠오르게 하는 사상가다. 노동과 평등을 주장한 이 사상이 오랜 세월 조명되지 않았던 이유는 역시 지배계급의 가치와 정 반대선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격동기가 끝나고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한 신분사회가 정착이 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계층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은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묵자의 묵은 우리말로 먹 즉 검은색을 뜻하지만, 그 검은색이 상징하는 바는 노동주의이다.  당시 묵자 집단은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며 근로와 절용을 주장하는 하층민의 집단이었다. 겸애와 반전평화를 핵심으로, 차별없는 보편적 사랑과 연대를 실천방식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매우 검소하고 실천적이었는데, 이런 헌신적 실천으로 몸에 살이 붙지 않아 깡마르고 살갗이 검어 묵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서 겸애란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겸애는 별애의 반대 개념이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묵자는 사회적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나아가 서로 이익이 되는 상리의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주장한다.
상리의 관계는 개인의 태도나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이다.

-신영복 강의-


이 책에 소개된 사상가들은 모두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사상가이다. 춘추전국시대는 이전 시대의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고 오로지 부국강병, 패권경쟁만이 중요했던 시대이다. 이런 사회 상황 속에서 여러 학파가 나왔으며, 각자는 자신의 사상과 지식으로 혼란한 사회를 타개하고자 했다.


공자 맹자는 지배계급의 틀을 인정한 채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시도였다. 묵자는 그와 반대선상에서 통치 권력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좌파 사상이었다. 노자와 장자는 인위적인 것 일체를 거부하며 그것으로는 사회 혼란을 타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이지만, 저자는 그 시대에서 오늘날을 본다.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춘추전국시대와 다를 바 없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2000년 전 제작백가의 사상이 저자의 해석을 더해 읽는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당시의 사상을 평가하면 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하고 읽는다면, 서구적 가치와 자본주의가 본성처럼 자연스러워진 우리의 시선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이다. 공자의 사상이 지배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에 대한 담론이든 민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고전의 답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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