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셋 18화

엄마 아빠는 사실 연인이었어?!

화 火

by 하이디 준

어제는 간만에 남편과 점심 데이트를 했다. 그는 내장을 속속들이 훑는 건강검진 이후라 맛있는 걸 먹겠다며 직접 맛집을 찾아 추천했고, 나는 간밤에 또 괜히 새 글을 끄적거리고 묵은 글을 읽다가 간신히 잠든 차에 부은 얼굴과 뿌연 정신으로 채비를 해 나갔다. 이상할 정도로 긴 가을 장마가 걷히고 유리잔이 울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하늘이었다. 나는 대번에 오후엔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가자는 선언으로 데이트에 시간 제한을 걸어버렸다. 그와 느긋하게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여지껏 아이에겐 티비로만 보여주고 동물원엔 가자는 말만 반복했던지라 오늘처럼 귀한 맑고 선선한 날이 아니면 또 다시 해를 넘길지도 모른단 조바심이 들어서였다. 그는 살짝 망설였지만 그러자고 했다.


평일에도 싼 주차장은 이미 만차인 동네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청춘처럼 걸어갔다. 그에게 허리를 잡혀 걸어가는 일이 살짝 서툴러졌지만 금세 적응했고, 여전히 그가 그 자세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게 좀 재밌게 느껴졌다. 그를 처음 만났던 10대 시절에 이미 그는 내 허리에 손을 두르는 버릇이 들었는데, 늘상 같은 방향을 유지해서 나중엔 내 허리가 한쪽으로 틀어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할 정도였다. 그런 걱정은 물론이거니와, 매번 목줄 걸린 양 잡혀가는 게 질리기도 해서, 변덕스런 어린 마음에 반대쪽에 서서 걸어가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조금 의아해하더니 다른 손으로 허리를 잡고 걸어가려 해보다가, 미묘하게 균형이 안 맞고 걸음을 맞추기도 어려웠는지 다시 직접 제자리로 돌아갔다. 골이 난 나는 “지겨워”라고 투정을 부리곤 먼저 휘적휘적 걸어가버렸고, 당황해 얼어버린 어린 그는 바로 쫓아오지 못하고 멀찍이 따라오며 하염없이 고민에 빠졌더랬다.


그가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그런 일들이 왕왕 있었다. 지금도 좀 그렇지만 어린 나는 더더욱 언제 터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죽처럼 짓궂고 유난스럽고 뾰족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얌전하고 순한 아이였지만, 조금이라도 친밀도가 생기면 나는 대번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1인극 문학소녀였고 장난스러운 소년의 가면을 쓰길 좋아하는 음험한 마녀였다. 반면에 그는 올곧고 단단하고, 때로는 차갑고 오만한, 하지만 그 속은 생각보다 몰랑몰랑하고 멍한 데가 있는 소년이었고. 무계획이나 어긋남, 돌발적인 것들을 지극히 싫어하는 그가 애초에 나에게 호기심을 가졌을 때부터 (어쩌면 그에겐 안 된 일이지만) 그에게 가해질 충격들은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는 거리에서 갑자기 “언젠간 세상을 정복하고 말겠어!”라고 외쳐버리는 여자 아이 옆에 서서 쩔쩔매거나, 잠시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무턱대고 음료수 박스를 사들고 속옷 바람의 가족들이 가득한 그의 집에 쳐들어가는 존재를 상대해야만 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왜 이 사람이 나를 여태 참고 봐줬지?’라는 의문이 들법도 한데, 나는 늘상 되려 내가 무지막지하게 참았던 부분들을 더 많이 떠올리곤 한다. 우습게도 내 감정 폭풍의 회오리 속에 내가 홀로 빠져있을 때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던 한편, 나는 그의 그런 굳건한 현실성, 둔감함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때도 있었다. 결국 나는 그를 필요로 했기에, 그를 참아냈다기보다, 나 스스로를 참아내는 법을 그에게서 차츰 배워갔던 것 같다. 지독히도 인내심이 부족했던 나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만의 무심함과 일상성으로 길들여갔던 거다. 그리고 아마 그 역시도, 야생의 산고양이를 품는 마음으로, 간혹 할퀴고 물어뜯을지언정, 하는 짓이 기특하고 재밌다는 이유로 계속 내 곁에 머물렀던 게 아닐까. 그를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이끈다는 자체로, 나 역시 그에게 필요한 존재였을 거라 짐작해보는건 지나친 비약일까.


차이가 매력이었던 연애 시절을 지나 차이가 성가신 결혼 생활도 어느 정도 지나보니, 나는 그의 일상의 작은 특이함에서 헛웃음을 흘리고, 그는 나의 기묘한 패턴을 숨쉬듯 자연스럽게 예상한다. 아침에 얼굴에 바르기 위한 로션을 손등에 짜고선 그 모양이 우주선 같다며 기뻐하는 그를 보고 나는 그저 빙긋 웃고 만다. 새둥지 머리로 점심에 가까울 시간에 어기적 기어나와 냉장고에서 초콜릿부터 꺼내먹으며 아침을 먹는 중이라고 웅얼거리는 나를 보고 그는 내 어깨만 토닥거리고 만다. 20년 세월은 서로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줄다리기가 낭만을 넘어 속박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말없이 서로의 자리를 조금 내주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다.


검진 이후의 빈속을 다 채워주지 못할 소바를 점심 메뉴로 선택해도 그는 국수와 일식을 좋아하는 나를 따라 가버린다. 어린 연인들처럼 허리를 잡고 거리를 누비고 싶어하는 그의 옆에서 나는 일상에 찌든 엄마가 아닌 다시금 발랄한 소녀가 된 마냥 웃어본다. 식사 후엔 작은 사진집 전문 책방에 들러 신기할 정도로 잡다하고 사소하고 우스꽝스럽거나 진지한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함께 고개를 끄덕일만한 장면과 사유를 찾아낸다. 나는 시종일관 들썩거리며 책마다 들춰대고, 그는 사뭇 심각하게 골라보지만, 결국 둘 다 무엇도 사지는 않고 나름 만족스런 시간을 보낸다. 간만의 문화생활에 여기서 두 시간은 더 보낼 수 있겠다며 나는 그의 데이트 코스 선정에 은근한 찬사를 보낸다. 그는 조금 으쓱하고 말지만 내심 싫지는 않은 눈치다.


둘만의 시간도 잠시, 우리는 다시 부모가 되어 어린이집 앞에 차를 세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아이는 엄마 말고 아빠도 와 있어서 신날 뿐이다. 부리나케 간 동물원에선 폐장 시간 전에 다 둘러보려고 우리는 번갈아가며 유모차를 미느라 숨차다. 아이는 그 역시 헤아릴 수 없는 얘기고 그저 수달과 코끼리에 열광해 떨어질 줄 모른다. 내 허리를 잡던 그의 손은 이제 아이의 허리를 잡고 유리와 울타리에서 떼어내느라 바쁘다. “좋은 데 다녀왔지~?”라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들뜬 아이를 두고 나와 그는 녹진녹진한 피로에 감싸여 웃어준다. 그래, 아가. 실은 엄마 아빠도 좋은 데를 다녀왔단다. 그리고 돌아와서 너에게 이렇게 웃어주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엄마 아빤 가끔씩 둘이서만 좋은 데를 더 다녀야 할 것 같아. 그래야 우리가 너의 엄마 아빠이기 이전엔, 서로를 애틋하게 여겼던 소년과 소녀였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겠지. 그러니 혹여 나중에 눈치가 백단이 되더라도, 그냥 그 때도 아가처럼 모르는 척 해주렴. 다 알지만 웃으며 놓아주는 게, 누군가를 가장 깊이 사랑하는 방식이니까.

keyword
이전 17화아이처럼 울 수 있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