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지 않아, 그립지 않아

토 土

by 하이디 준

사람들을 멀리하고, 내 방을 정돈하고, 가족 같았던 인형들도 매몰차게 버리고, 아프고 병들었던 몸도 추스르고, 무엇보다 마음과, 기억을 천천히 비우고 닦아냈다. 그래서 그나마 간간히, 순수-명랑-긍정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역시 쉽게 흔들리곤 한다. 여전히 귀신처럼 어디선가 울려오는 광기의 끔찍한 말들. 너는 평범하고 아무 의미 없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 너에겐 늘 불행이 닥칠 거라고, 두고 보라고. 그렇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 그러면 나는 일부러라도 순한 보름달에서 퍼져나오는 고요한 빛을 그리며, 내 머릿속을 정화해본다.


하지만 외로운걸까? 사람이 싫다고, 지금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데 꿈속에선 예전에 알던, 평소엔 생각조차 않던 사람들의 이름이 오고가고, 심지어 사촌들과 너무나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이제와서? 그 이름들이 나에게 뭐라고?


게다가 꿈에서 보고 난 후로, 정말로 사촌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일까. 나는 부러웠던 걸까. 영상에서 보는, 소설 속에서 만나는, 그 화기애애한 관계들이. 아니, 더 가까운 곳에, 내가 사랑하는 그에게, 아직도 만날 수 있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사촌들이 있다는 게, 몹시 부러웠다. 역시 그 때문이다, 그의 가족.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시키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텐데. 만일 내가 무한에 가까운 용기를 내더라도, 그들이 날 반기지 않을텐데. 어른들이 뱉어놓은 온갖 말의 회오리에 휩쓸려서 떨어진 우리들은, 전혀 다른 공간, 다른 기후에서 자라나, 이젠 낯선 어른들이 되었을텐데. 어린 시절에 함께했던 놀이 같은 것, 그거야말로 꿈이나 다름없이 퇴색했을텐데. 나는 뭘 바라는걸까. 그들과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게다가, 나는 우리들의 관계조차, 과거의 역사를 반복할 끔찍하고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것으로 변할까봐, 두려워서 시작조차 못할 게 아닌가.


순전히 결혼 얘기 때문이다. 누구를 부르고 부르지 않고의 그 성가신 문제. 나는 너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미래를 그려보다가 함정에 빠진거다. 애초에 결혼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우스워서, 가당찮아서, 나는 이런 그리움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하객 수를 계산하는 사회에 놀아나는 거라고도 말할 수가 없다. 이건 절대, 그래도 핏줄인데, 아주 남은 아닌데, 우리가 미워할 이유는, 못 만날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서로를 잃어버리는 건 너무 안타깝지 않나 하는 평화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게 아닐거다.


그런데 나는, 할아버지 산소에도 가보고 싶다고 느꼈고 외할아버지 산소도 보고싶다고 생각한 순간, 이상하게 슬퍼졌다. 며칠 전에도 갑작스럽게 우울했던 날, 아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나는 그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들에 대해 또 그려보고 있었다. 왜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잃은 이들과 아직 잃지도 않은 이를 생각하며 때맞지 않은 애도에 빠져들어 버린 것일까.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조작된 느낌이 풀풀 난다고, 부자연스럽다고 꾹꾹 눌러가며 진정시킨다.


미래를 그린다는 건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묻었던 과거를 들추는 못된 짓은 밤과 죽음만이 하는 일들인 줄 알았는데. 유령이 사라지고 나니, 미움을 씻어내고 나니, 그걸 되돌리고 싶어진 건가. 이상한 착각에 빠져가는 건가.


내가 나를 괴롭힌 시간들에 대해 충분히 참회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어디까지 용서를 빌기를 바라는 걸까. 내가 잃어버린 것들, 그건 정말 내 탓이 아니잖아. 아니야? 그들을 미워했던 것까지 뉘우쳐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땐 그게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잃어버린 것 따위 필요없다고. 새로 만들면 그뿐이라고 그렇게 하고 잘 지내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될 일. 지나간 것들에 왜 새삼 미련을 갖는담.


결혼이 하고 싶은 건, 바로 새로 만들면 그만이라는 그 생각 때문. 역시 가소로워. 그렇게 지독한 꼴들만 보고서도, 또 희망을 가진다니, 믿는다니, 믿고 싶어한다니. 나를 이렇게 만든 그가 때로 밉다. 행복해질거라고 믿게 만드는 사람은 가장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심지어는 그에게도 나에게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기를, 그 역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기를 바랄 지경이다. 그는 가장 어두운 시절에 나를 구해주고서도, 아마 이 날 이 순간까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 터.


그들이 그립단 건 거짓말이야. 그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거야.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흔한 착각에 불과해. 하지만 또 용서를 빌어야 할 생각도 했었다. 할머니,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 사람은 여전히 미워하고 있는 거구나 새삼 깨닫고,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한 번쯤 보고 싶은건가 새삼 놀라고.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냄새와 미래의 색채로 뒤섞인 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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