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조약돌 둘 11화

종이 방패와 펜 칼의 파수꾼

금 金

by 하이디 준

간만에 긴 가을이 왔다. 그 때문인지 다시 또 뭔가를 끄적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그 묘한 성가심은 바늘처럼 온몸을 훑으며 찔러대고, 결과적으로 내가 멀쩡한 상태인지 골수까지 병든 상태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밀어내고 발버둥쳐도 좁은 세상과 그 안에 엮인 관계의 거미줄 안에서는 헤어나올 길이 없고, 나는 휴짓조각에 숨막혀하는 병신처럼 늘 호흡을 헐떡이며, 속을 태우고 끓여간다.


내 자유는 언제나 종이 위에서만 실현된다. 종이에 새기지 않는 시간들은 허망하고 무가치하다. 그런 백지의 시간들이 많아질수록 내 존재 역시 조금씩 지워져간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날들이 늘어만 간다. 살든 살지 않든 무의미해서, 살고자 하는 모든 행위의 당위성에 의문만 생긴다.


남들과는 달리, 나는 모든 것을 언어로 치환하지 않고선, 그 무엇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어쩌면 남들도 그러할지 모르지만, 내 기억의 용량은 평균보다 현저히 낮은 듯 싶다.


한 때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했던 말은, 일말의 진실과 환상이 보태진, 자만심의 꼬리가 붙은 수사적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제 그 문장에 속박된 모양이다. 나는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쓰지 않으면 생각도 멈추고, 마음이 졸아들고, 영혼이 갈라질 듯 메마른다. 치유를 위한 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서 내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건 착각이었다. 나는 그냥 ‘살아만’ 있을 뿐인 존재가 되어갔다. 나는 이미 쓰는 것에 너무 의존했고, 중독되어 있었고, 그래서 쓰기를 멈추면 숨쉬기도 멈출 것이라는 걸,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쓰는 것으로만 내 존재를 매 순간 확인할 수 있다. 타인과 물건과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나 같은 생명체에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거다.


관계의 거미줄을 끊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죽음을 환영하는 나는 어딘가 많이 어긋나버린 인간일까? 많은 돈이 있었다면 죽음을 대신해서 내가 원하는 고독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나에게 뭔가 요구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내가 갚아야 할 것이 없는 세계.

오롯이, 나 홀로, 충만한 세계.


그런 세상은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존재한다.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방법은, 종이 위의 땅을 넓혀가는 것뿐.


현실에서의 나는 언제나 감사할 줄 모르고, 배은망덕하고, 건방지고 오만한 인간.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에 편협한 인간.


하지만 그렇더라도 상관 없어.

더, 더 나쁜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까, 그저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주고 싶지도 않아.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결국엔 모두들, 자기방식대로 날 대하는 것 뿐인데,

왜 나는 그러면 안된다는 거지.

keyword
이전 10화쥐불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