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
나는 태생이 된장찌개에 삼겹살이 없으면 저녁 진지를 안 잡수시던 아버지 밑에서 만 18년을 살았고 (그런 아버지의 식성에 군말 없이 묵묵히 밥을 차리던 엄마의 뒷모습이 난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 땐 술을 마시면 숙취로 반드시 뜨뜻한 국물로 하루를 맞이해야 직성이 풀리는 삶을 살았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음식 하나를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김치'라고 소리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적 불문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여러 문화에 거부감이 없는 오픈적이고 플렉서블한 혹은 해외 경험이 풍부하다 못해 철철 넘치는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오해를 하곤 하는데, 아마 나의 이런 겉모습 혹은 사람들을 오해하게끔 하는 취향은 내가 북미에서 생활하고 유럽에서 여행을 했을 때 생긴 하나의 독특한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을 하는 프랑스 동료 1의 메신저 자기소개란에 흥미로운 코멘트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喜歡喝酒,曬太陽' (= 술 마시고 햇볕 쬐는 걸 좋아해.) 난 이 코멘트를 본 순간 어찌나 격하게 공감이 되던지. 그래 맞아! 나 역시 타이완에 오고 난 이후로 가장 원하고 또 원했던 그 한 가지가 바로 '햇볕'이 아니었던가. 쨍하고 바스락바스락 고소한 소리가 날 것만 같은 오렌지 빛깔의 그 선명하고 아름다운 태양빛, 내가 타이페이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아쉬운 1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다름 아닌 빛이었다.
타이페이하면 으레 눅눅하고 비가 자주 오는 습한 날씨 때문에 그레이 시티라는 조금 달갑지 않은 별명이 항상 따라붙는데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타이페이에 오기 전에 타이완이라는 곳은 아주 순수한 아열대 기후를 가진 나라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태국이나 필리핀 같은 그런 아열대 기후 말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아주 잔혹하게도 겨울이 되면 끊임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이런 걸 겨울이 아니라 우기라고 부르는지도) 이로 인해 끔찍하게 높은 겨울 습도는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던 피부병을 발병하게 만들었으며, 태초부터 난방이 없는 이 나라 시스템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 전기장판까지 공수하는 난리판까지 벌어졌다.
나도 이제는 어엿한 6년 차 타이페이 시민이지만 여전히 타이페이의 날씨, 특히 겨울 날씨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고 딱 이 시기만큼은 몸의 우울 지수도 높아져만 간다. 그렇기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태양이 쨍하고 뜨는 날이면 일단 무조건 밖으로 나가 광합성을 한다. 조금이라도 더 볕을 쐬고 싶어서였다.
한 가지 재미난 또 다른 사실은 이 나라의 비타민D 섭취 적정량도 한국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난 아마도 모계 쪽 유전으로 인해 뼈의 골밀도가 일반인들보다 조금 낮은 편인데 그래서 가능한 칼슘과 비타민D를 잘 챙겨 먹으려 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 특정 브랜드의 비타민D를 꾸준히 섭취하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갈 때 항상 그 브랜드로 구매를 해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출국이 어려워지면서 타이완 국내의 그 브랜드 스토어에 직접 가서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 이로 인해 한국의 적정 섭취량은 1000이지만 타이완의 적정 섭취량은 400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타이완 스토어의 직원은 아마 나라마다 날씨나 기후가 다르고 이에 따라 권장량도 달라지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쭉 1000을 먹어왔다면 그냥 400짜리를 두 알을 먹으라는 권유 아닌 권유를 해주었고 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시행을 해왔다. 최근엔 다른 브랜드로 갈아탔지만 여전히 한국과 타이완의 적정 섭취량 차이는 ‘아무리 한국보다 위도가 낮다고 하나 실제적으로 내가 느끼는 태양과의 만남은 한국보다 훨씬 적은데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과 혼란을 품게 하였다.
그렇기에 나는 해만 뜨면, 공원만 보이면 그냥 그 자리에 망설임 없이 드러누워 버리는 유러피언들의 습성을 너무나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난 타이완에서 무시무시한 벌레들의 공격 때문에 공원에 가지도, 가더라도 풀밭에 드러눕는 어리석은 짓 따윈 하지 않지만 말이다.
우리에겐 정말 태양이 필요하다.
따뜻하고 풍요롭고 그 어떠한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보드랍고 살가운 기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