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편은 외동아들입니다. 그래서 시부모님은 처음부터 저를 며느리가 아닌 딸로 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시아버지 핸드폰에 며느리인 저는 '막내딸'이라고 저장되어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어요. 오히려 조금 설레고 좋았던 적도 있죠. 그래서 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친정아빠를 대하듯 시아버지를 대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친정에서 하던 대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거실 소파에 기대어 두 다리 쭉 뻗고 텔레비전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친정부모님과 저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끈으로 30년간 이어져온 사랑과 정, 그리고 함께 보낸 행복했던 시간, 때로는 서로가 부딪치며 서운하고 미워했던 시간들까지 더해져 고마움과 미안함을 바탕으로 하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애틋함과 많은 추억이 가득해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선택하며 자동으로 엮인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요? 저의 시부모님은 딸이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30년 가까이 사셨습니다. 그동안 그분들은 우리에게 딸이 있다면? 딸은 이렇겠지?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사셨을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이 딸처럼 여기겠다는 현실의 며느리는 그 오래된 환상을 100% 충족시켜줄 수 있는 드라마 속에나 존재하는 딸의 모습이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요즘 많은 시부모님들은 옛날처럼 며느리를 밑도 끝도 없이 구박하며 하대하고 시집살이를 시키지는 않습니다. 제사를 없애고 명절 연휴에 여행을 가거나 각자 보내기로 하는 등 그분들도 나름의 노력을 많이 하고 계신 거죠. SNS를 보면 명절 때마다 시부모님의 배려로 여행을 가거나 가까운 친정에만 방문하고 거리가 먼 시가에는 다음에 가기로 했다거나, 명절 음식은 시어머니 혼자 다 준비하셨다며 '우리 시댁 최고', '사랑해요 어머님' 등의 게시물이 잔뜩 올라옵니다. 그런 글들을 보다 보면 저도 며느리 입장이기 때문에 부러울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혼자서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명절에 다 같이 모여 얼굴 한번 보는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서로의 되어버렸는가 씁쓸하기도 합니다.
SBS TV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개그맨 박명수가 나왔을 때 그의 "딸 같은 며느리, 그런 건 없어요. 며느리가 원하지 않아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건 어려워요."라는 단호한 발언이 기혼여성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왔습니다. "결혼이 뭔지 아니? 금가락지인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놋 가락지도 안 되는 거야. 그런데 더 압권은 시부모는 다이아를 준 줄 안다는 거야." 워낙 인기 있는 드라마이기도 했지만 이 대사 역시 많은 며느리들이 공감했습니다. 유아 체육 프로그램 중 '트니트니'에는 이런 노래가 있다. "난 멋있으니까, 난 잘났으니까, 난 빛이 나니까." 이 노래 가사를 들으며 저희 부부는 '모든 부모가 이 노래를 자기 아이의 주제곡이라고 생각하겠지?' 하며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부모는 내 자식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시부모님들은 내 아들이 너무나도 '더' 특출 나게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못났으면 못난대로 며느리가 잘났으면 잘난 대로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떠한 일이 잘되면 내 아들이 잘나서, 일이 잘 안 되면 며느리가 부족해서라고 합니다.
저도 결혼 준비를 할 때부터 주위에서 많은 조언을 들었습니다. 잘해봐야 소용없다, 처음부터 잘할 필요 없다, 괜히 기대치만 커져서 나중에 더 힘들어진다, 아무리 잘해줘도 시는 시다, 등등. 사실 처음에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나는 시부모님께도 잘할 것이고, 어른들도 그런 내 마음을 분명 알아주실 거라고, 예쁘고 착한 마음으로 현명한 며느리가 되어 시부모님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살겠다고, 그렇게 혼자 다짐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의 모습은 그때 제게 그런 조언을 해주었던 결혼생활 선배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슬픈 현실이지 않은가요? 제가 좋은 마음으로 잘하고 노력하면 모든 상황이 좋게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늘 제가 참고 양보하고 배려한 공은 없더라고요. 언젠가 이런 제 속마음을 주위에 털어놓았더니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생각이 깨어있는 어른들이 많다고 해도 여전히 여자는 결혼을 하면 시부모님 때문에 일정 부분 불행하고 억울하기도 한 결혼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었습니다.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에요. 다만 예전에는 아이 때문에 참고 살고, 혼자 속으로 삭였다면 요즘은 다릅니다. 며느리들의 대처방법이 능동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몇 년쯤 지나면 며느리가 시부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우울증이 왔다, 시가 문제로 남편과 함께 부부상담을 받는다, 시부모와 말 그대로 연을 끊고 일체의 연락이나 만남 없이 남편만 따로 부모님을 만난다, 이런 경우들을 생각보다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식이 70세 노인이 되어도 부모에게는 영원히 어린아이라고 하잖아요. 부모는 자식이 부족해도 그저 사랑으로 늘 감싸게 됩니다. 오히려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합니다. 내 자식은 내 뱃속에서 열 달을 품었고, 태어나서부터 장성하기까지 모든 순간을 내가 지켜보았고 내 손길이 닿았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못난 짓을 해도 이해할 수 있는 내 자식입니다. 하지만 며느리는 다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 된 상태로 마주하는 관계입니다. 내 자식처럼 마냥 어린애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성인, 다 자란 어른일 뿐이죠. 또한 시부모와 며느리는 나와 내 자녀가 서로를 알아가고 맞춰가며 함께 보낸 몇십 년의 누적된 세월이 없는 낯선 존재입니다. 게다가 내 자식도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하는데 남의 자식인 며느리가 어떻게 나의 기대와 바람에 꼭 맞을 수 있을까요? 간혹 며느리에 대한 욕심이 많은 시부모님들은 본인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라서 아들과 이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해피엔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서로의 기대에 못 미쳐 트러블이 생기고야 말죠. 개인적인 친분으로 만났을 때나 회사에서 혹은 일적으로 만난 사이일 때와 가족으로 엮이며 각자가 다른 포지션에 놓였을 때 사람의 모습은 누구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결론은. 이 세상에 딸 같은 며느리는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