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여름은 아무 말 없이 끝났다

잊는 대신 견디는 사람에게

by Helia

잃는 데 익숙해졌어.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 같더라.
처음엔 물건을 잃고, 다음은 기회를 잃고, 그러다 결국 누군가를 잃게 되지.
그리곤 깨닫게 돼. 이제는 잃는 것조차 당연하다고 느끼는, 그런 내가 되어버렸다는 걸.

한때 ‘상실’이라는 단어는 낯설고 아련한 맛이었어.
국어책에 나왔던 문장 속 단어였고, 어디선가 들은 문학적인 표현 같았지.
그땐 그 말의 무게를 몰랐어.
근데 살아보니까, 그 단어는 너무 자주, 너무 쉽게 찾아오더라.
너무 익숙해져서 무서운 감정이야.

그 여름이 그랬어.
특별할 것도 없는 계절이었는데, 그 사람은 그 계절에 사라졌고,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어.
해는 변함없이 떠올랐고,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었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버린 것 같았지.
몸은 걷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 사람의 마지막 인사에 붙들린 채였어.
그 말도 참... 무심했어.
우리, 좀 쉬자.

‘좀’이란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때 처음 알았어.
쉬자는 말도 결국은 끝내자는 거였고, 그 말은 잠시 멈춘 게 아니라, 영영 멀어지자는 뜻이었더라.
누군가와 거리를 둔다는 건, 점점 그 사람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는 연습 같아.
그 사람 없는 하루가 쌓이면, 결국 그 사람 자체가 흐려지는 거잖아.
기억이라는 건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잔인하게 퇴색되지.

그래서 더 마음 아팠어.
선명한 얼굴보다 흐릿해지는 기억이 더 무섭더라.
자주 입에 올리지 않아야 겨우 견딜 수 있었고, 어설프게 그리워하면 도로 무너져버렸어.
작은 자극에도 흔들렸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노래 한 곡에 무너졌고.
길거리에 퍼지는 익숙한 향기, 누군가의 말투, 오래전 주고받던 농담 하나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짜여 있던 내 삶의 질서를 잃는 거야.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지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음식이 갑자기 밉고, 같이 가던 카페는 피하게 돼.
그 사람 없는 세상이 나를 낯설게 만들어.
내가 나를 모르겠는 그런 감정.
어디까지가 그 사람 때문이었고, 어디부터가 나였는지 헷갈려.
그게 진짜 상실이야.

상실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게 아니더라.
그건 천천히 스며드는 거야.
아무렇지 않게 웃던 날에도 슬픔은 조용히 흘러들어와.
침대에 누웠을 때, 핸드폰 화면을 보다 문득, 그런 사소한 순간에 불쑥 찾아오지.
그리고는 마음 한편을 조용히 잠가버려.
말로 꺼낼 수 없는 감정들이 쌓이고, 입을 열어도 목이 막혀.

그래도 말이야.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쌓이긴 해.
그 사람이 떠난 자리는 여전히 허전하지만, 그 빈틈에 문장을 적고, 음악을 듣고, 나를 다시 채워 넣어.
아직은 그립고, 가끔 울컥하지만, 그마저도 나야.
슬픔을 안고 사는 법,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야.

잊는 건 불가능해.
사랑했던 순간을, 함께 웃었던 시간을 어찌 잊겠어.
그래서 나는 애써 잊지 않기로 했어.
대신 견디기로.
어제보다 오늘을 조금 덜 아프게 살아보기로.
그게 내가 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야.

지금 이 글을 읽는 너도, 아마 어떤 것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사람이든, 감정이든, 혹은 예전의 자기 자신이든.
괜찮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는 손이어도, 그 손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시작이 될 수 있어.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으니까.
지금 네가 느끼는 그 텅 빈 감정도 언젠가는 너를 다른 모습으로 바꿔줄 거야.

상실은 끝이 아니라, 아주 긴 쉼표 같아.
그 쉼표 너머의 문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을 뿐이야.
그러니까, 조금 더 살아보자.
그 사람 없이도, 그 시절 없이도, 그 마음 없이도.
살아내는 우리가 더 아름답다는 걸, 언젠가는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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