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워녕 Apr 13. 2021

'매우 친절'의 메커니즘

엄마는 옳았다.


  50대 남성 두 분이 카페에 들어오셨다.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주문하셨는데, 주문을 받는 과정부터 커피를 가져다 드리는 과정에서 한 분이 유독 나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영수증 필요하실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괜찮습니다아~ 버려주세요오~"라고 하셨고, "쿠폰 드릴까요?"라는 질문에는 "네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커피를 가져다 드리자 "고맙습니다. 맛있게 잘 마실게요!"라고 하셨다. 

  가끔 이렇게 '매우 친절'한 손님이 계셔서 나는 이 분도 '매우 친절'한 손님이시구나 하고 생각하며 카운터로 돌아오는데, 같이 온 다른 손님이 그분께 이렇게 말하는 게 들렸다. "아니, 오늘 왜 이렇게 친절해? 원래 이렇게 친절했어? 아니잖아?" 그러자 그 '매우 친절'한 손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글쎄, 모르겠네. 여기 오니까 괜히 그렇게 되네."




  옆집 사장님과 주민센터에 방문했다. 주민센터 직원이 "이건 여기에 이렇게 이렇게 작성해 주시고요, 저건 여기에 이렇게 이렇게 작성해주시면 됩니다아~" "1층에 내려가셔서 이거 보여주시면서 수납하러 왔다고 하시면 수납 도와드릴 거예요~"라고 또 '매우 친절'하게 알려주시길래, 나는 이 직원분이 참 '매우 친절'한 분이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 있던 옆집 사장님이 그분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원래 이렇게 친절했어요? 지난번에는 안 이랬잖아요." 그러자 주민센터 직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오늘은 왠지 더 잘해드리고 싶네요." 




  알고 보니 '매우 친절'한 분들이 아니었다. 다들 원래 그렇게 '매우 친절'한 분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한테 '매우 친절'한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찍 소리도 못하게 해." 이 말은 화를 내고 역정을 내서 상대방을 이겨먹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베풀어 상대방이 전의를 상실하게 하라는 말이었다. 호의적인 상대방을 더 호의적으로, 그리고 호의적이지 않은 상대를 호의적으로 만드는 법이었다. 


  엄마는 옳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안 그래도 사람으로부터 마음 다칠 일 많은 이 세상에서, 사소한 일들은 가볍게 넘어가 주는 게 나한테 이로운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예뻐하지는 않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거나 적대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밝게 웃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털어 그들에게 안겨주면, 그들은 무력해졌다. '찍' 소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로 내게 다가왔다. 


손님의 하트 




  가게 문이 열리며 '딸랑' 소리가 나면 나와 알바생은 반사적으로 "어서 오세요!"라고 소리친다. 잠시 후 손님의 얼굴을 보고 눈이 마주치면 나는 웃으며 한번 더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의 인사법이다. 나는 굳이 한 번 더 인사한다. 또 온 손님에게는 '또 오셨네요!' 하며 아는 척하는 마음으로 인사하고, 처음 온 손님에게는 '너무나 반갑습니다!' 하는 마음을 담아 인사한다. 일부러 눈을 찡긋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내가 웃으면 함께 웃어주신다.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함께 "안녕하세요^^"라고 해주시는 것이다. 이어지는 우리의 주문은 매끄럽고, 커피는 한결 더 맛있어진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온 손님들은 먼저 아는 척을 해주실 때가 많다. "저 왔어요!"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안녕하세요^^"하며 눈을 마주치며 찡긋해주신다.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의 손님들도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같이 "안녕하세요^^"하며 웃어주시는데, 그러면 나는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다. 커피를 다 드시고 나가실 때 먼저 "안녕히 계세요^^"라고 웃으며 인사해주시면 나는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하는데, 그러면 그분이 다시 한번 뒤돌아 나를 보며 고개를 꾸벅해주시거나 눈을 찡긋해주시는데, 내 마음은 하늘을 난다.  




  우리 카페는 직접 로스팅도 하고 메뉴에 핸드드립 커피도 있다 보니, 커피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분들이 종종 있다. 몇몇 분들은 좀 깐깐하게 물어보신다. 무슨 원두를 어떻게 어떻게 로스팅했고, 무엇 무엇을 블렌딩 해서 무슨 맛이 나고, 무슨 향을 내고, 또... 아무튼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들에게 나는 내 모든 시간을 바치는 느낌으로 설명해드린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어제 오신 손님은 어떤 걸 드셨고, 나는 어떤 걸 좋아하고, 오늘 같은 날은 이런 게 어울릴 것 같고... 


  새침한 모습으로 팔짱 낀 채 계속 이것저것 예민하게 물어보시던 한 손님은 내가 추천해드린 커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드시고 가시더니 (내가 화장실 간 사이) 붕어빵을 사들고 돌아오셔서는 우리 알바생에게 붕어빵을 주시며 사장님과 함께 먹으라고 했단다. 나는 알바생에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른 냉장고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귤 몇 개를 꺼내 밖으로 달려 나가 그분에게 귤을 드렸다. 그분은 귤을 받아 들고 활짝 웃으셨다. 절대 웃을 것 같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내 마음은 하늘을 날았다. 




  40대 후반~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손님 4분이 오셨다. 문을 열 때부터 시끌시끌하던 이 분들은 들어오셔서는, 우리 카페가 생기기 이전의 카페를 자주 와서 그때 사장님을 잘 안다고 하시면서, 근데 그때 그 카페가 바뀌어서 참 아쉽고, 그분이 참 친절하셨고, 원두 찌꺼기도 달라면 챙겨주셨다고 한참을 이야기하셨다. 요는, 그러니까, 원두 찌꺼기를 달라는 말이었다. 해주는 거 봐서 앞으로 여기를 또 올지 결정하겠다고도 했다. 


  나는 원두 찌꺼기를 넉넉히 챙겨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예쁜 쇼핑백에 넣어 직접 갖다 드렸다. 그분들은 쇼핑백을 손에 받아 들고 잠시 조용해지셨다. 그렇게 시끌시끌하던 분들이. 그리고 어벙벙한 표정. 우리 엄마는 옳았다. 그분들은 한동안 '찍' 소리도 하지 못하시다가, 잠시 후 고맙다고 모기만한 소리로 말씀하셨는데, 나는 찡긋 웃으며 이렇게 말씀드렸다. "얼마나 필요하실지 몰라서 일단 이만큼만 담았어요. 더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다음에 오실 때 말씀하시면 챙겨드릴게요. 이것만 달라고 잠깐 들리셔도 괜찮습니다^^" 


  엄마는 옳았다. 내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초등학교 1학년 등교 첫날에도 데려다주지 않고 "잘 다녀와"라며 나를 혼자 학교에 보내던 우리 엄마는 싸우지 않고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다. 싸우지 않았으니 승자도 패자도 없지만, 난 기분이 좋았다.  


  그분들은 나가시면서 "커피 잘 마셨습니다. (쇼핑백을 들어 올리며) 이것도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뵈어요."하고 꾸벅 인사하고 나가셨다. 내 마음은 하늘을 날았다.   




  지난주 어느 날 저녁에는 5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이 혼자 오셔서 커피를 드셨다. 나는 저녁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겨놓고 뒤에서 창고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주문하는 소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커피 한 잔 줘요"라는 말부터 시작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원두는 무슨 원두를 쓰는지, 산미가 있는지, 있으면 얼마나 있는지, 커피 향은 어떤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문제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뒤에 있는 내가 언뜻 듣기에도 성의 없이 툭툭 던지는 말투. 뭔가 꼬장꼬장하면서 툴툴거리는 느낌. 주문을 받고 커피를 가져다 드리면서 알바생은 약간 주눅 들어 있었다. 


  그분은 커피를 드시다 말고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와 컵 뚜껑을 달라고 하셨는데, 문제는 또 말투였다. "접시 같은 것 좀 하나 줘요!" 당황한 알바생은 그 요구를 이해하지 못했고 "접시요? 무슨 접시요?"라고 물었다. 안 되겠다 싶어 뒤에 있던 내가 달려 나갔다. "어떤 거 필요하세요?^^ 제가 뭐 좀 챙겨드릴까요?^^"라고 하자, 그분은 커피가 식지 않게 컵 위에 덮어 놓을 만한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아 그럼 컵 뚜껑이 필요하신 거죠? 요걸로 드리면 될까요?" 하자 그분은 컵 뚜껑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가 앉으셨다. 

  상황은 해결되었지만, 나는 왠지 불안해서 창고 뒤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카운터를 지켰다. 알바생에게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저분이랑은 내가 이야기할게요." 아니나 다를까, 그분이 이번에는 "화장실은 어디예요?"라고 또 툭 던지며 물어보셨다. 나는 친절함을 끌어모아 화장실을 알려드리고 손에 화장지도 쥐어드리면서 "비밀번호 있으니까 누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녀오세요오~"라고 했다.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커피도 다 드신 그 손님은 나가시면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커피 맛있네요. 잘 마셨습니다." 이런 말 절대 안 하실 것 같던 분이었는데. 나는 방긋 웃으며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인사해드렸고, 그분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셨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돌아온 알바생은 털썩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 싱글싱글 웃었다. 


  다음날 저녁, 그 손님이 또 오셨다. "어서오세요!"하는 나에게 그분은 들어오시면서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꾸벅하며 인사해주셨다. 나는 아주 반갑게 "안녕하세요^^"라고 찡긋 인사해드렸다. 내 마음은 하늘을 날았다. 엄마는 옳았다. 



        

이전 07화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해 주시다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