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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대로 삶 Oct 21. 2023

시댁환장곡-27화 설 명절의 진정한 피해자를 찾아서

50되기 365일전, 7남매 막내며느리의 시댁과 제사와 명절이야기

시댁환장곡 27화 설 명절의 진정한 피해자를 찾아서.

50되기 365일전, 7남매 막내며느리의 시댁과 제사와 명절이야기 


시댁환장곡 27화 설 명절의 진정한 피해자를 찾아서.


시댁에서 피해자는 며느리라는 점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불합리는 함께하는 집단이 개혁과 투쟁으로 파괴되었다. 며느리는 집단이 될 수 없는 개인이다. 그래서 뭘 도모하기 전에 아예 싹이 트기도 전에 무너질 때가 많다. 남편은 나와 일대일의 관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시댁의 테두리만 들어가면 남의 편이 되어버린다.      


나에게 남편만 내 편이지만 남편은 나와 시댁 식구들 모두 자신의 편이라 나와 같을 수가 없다. 그런 혼자라는 깨달음은 작은 것도 바꿀 힘을 차단한다. 시댁에서 처음 느낀 감정은 낯섦과 어색함이었고 그다음 깨달음은 내가 약하고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족은 피로 맺어진 혈맹이다. 깨지기 쉽지 않다. 그리고 며느리라는 낯선 이방인의 등장은 그 견고함을 더욱 공고히 만든다. 그래서 며느리는 가족이 되기보다 공공의 적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겉으로는 며느리를 위하고 편이 되어 줄 수 있다. 그것을 믿고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결혼 초기에는 할 수 있다. 남편을 사랑하면 할수록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솟으니까 말이다. 혼자라고 느낄수록 소속감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착한 며느리가 되려고 노력이란 것을 해 보았던 거 같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잘해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잘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며느리가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단 아들을 낳으면 좋다. 막내아들에게 시집갔는데도 내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친정엄마는 한시름 놓았다고 하셨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바란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알았다.     


그리고 시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빠지지 않고 솔선수범해서 하면 된다. 대표적인 것이 제사와 명절 그리고 생신이나 모임을 챙기는 것이다. 챙긴다는 것이 음식 장만과 마음 씀씀이를 의미하고 모든 행사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다.     


시댁이란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제사와 명절, 생신과 모임을 무한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을 챙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표출하지 못하고 쌓여가는 억울함과 짜증 그리고 피해자라는 강한 확신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며느리는 그렇게 시댁에서 피해자로서 남는 것이 진정 결말인가? 그건 싫다. 그럴 리가! 영화를 보면 모든 복수는 피해자의 강한 각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영화의 결말에는 관계의 전복이 일어나면서 마무리된다는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약하고 힘이 없는 며느리가 점점 나이를 먹는다. 이제 며느리에게는 머리가 굵어진 장성한 자식들이 생겼다. 평생 바깥을 돌던 아빠 편을 들기보다 옆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었던 엄마 편을 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특히나 딸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넉넉하게 넘치게 가르친 교육으로 아는 것도 많고 본 것도 많아 시댁에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사춘기가 시작되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무조건 엄마 편을 든다. 딸이 있다면 판이 급속도로 변화한다. 일단 아빠를 장악하고 오빠와 협력하여 엄마를 두둔한다. 게다가 엄마가 아픈 곳이 있거나 간단한 수술이라도 받기라도 했으면 딸이 먼저 나서서 엄마를 보호한다. 그리고 남자는 50이 넘으면 삶의 비중이 회사에서 집이 커진다. 비중이 커졌다고 하나 집은 이미 아내의 것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크기에 밥이라도 얻어먹기가 예전처럼 수월하지는 않다. 때가 지나 늦게 들어갔는데 밥 달라고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면 뭐 아직 건재하다고 인정하겠지만 9시 넘어 저녁 챙겨달라고 하면 얻어먹을 수는 있지만 아내 눈에서 나오는 레이저와 귀찮음의 손짓과 더불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시기가 다르겠지만 남편들은 아내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든 문제의 열쇠는 며느리가 잡았다고 보는 것이 맞는 거 같다.     


딸은 억울함을 물에 새기고, 며느리는 억울함을 돌에 새기는 것 같다. 그만큼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하고 만만할 때 배려하지 않고 성질대로 했다가는 나중에 후회할지 모른다. 잊지 않는 사람이 힘을 얻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영화처럼 엄청난 복수는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복수인지도 모르게 복수를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 병원에 다닐 일이 있었다. 접수하고 기다리면서 사람들을 보게 되는 데 대부분 환자는 70대 이상 노인이 많다. 그런데 환자를 동반한 사람이 딸이거나 아들로 보인다는 것이다. 당연히 자식이 자기 부모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것은 상식이다. 


특히나 50~60대 남자들이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온 경우가 많은 거 같아 놀라웠다. 어떻게 아냐고? 50~60대 남자들이 절대 장인, 장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올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위라면 딸이 있을 텐데 세상에 딸이라면 자기 부모님이 사위보다 딸인 자신을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에 사위만 보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정엄마를 간병할 때도 며느리가 병문안을 온 적은 있어도 간병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시어머니가 큰 수술을 받아 입원했을 때도 병실에 모든 사람은 나를 딸이냐고? 몇째 딸이냐고 물었다. 며느리라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이미 현실은 이렇게 바뀌었다.    

 

요즘에는 장남이랑 결혼해도 시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다. 부모님이 연세가 많고 거동이 불편하면 덜 아픈 배우자가 아픈 배우자를 간병한다. 그리고 혼자 남아도 자식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부모님이 아프고 거동이 힘들어지면 병원에 입원하고 더 안 좋아지면 요양병원, 요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신다. 지금은 부모님은 모시는 시대가 아니다, 그리고 아파도 입원해서도 자식이 간병하는 시대가 아니다. 


시댁에서든 병원에서도 며느리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시댁에서 진정한 피해자는 과연 누구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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