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극단의 두 개념에, 실천하기 매우 어렵긴 하지만 주변에 꼭 한둘은 이런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난 아직은 둘다 아니라는 점이랄까.
"제 꿈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각자의 장래희망 내지는 되고 싶은 직업에 관해 발표하는 시간. 가깝게 지냈던 P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P는 공부도 곧잘 하고 성격도 활발해서 누가 봐도 '재원'이라 불릴만한 친구였다. 그런데 고작(?)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니.
물론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아야 하고, 퍽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진 알파걸로 자라나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P의 대답이 영 마뜩지 않았다. 좀 더 원대한 꿈을 꿔볼 수는 없는 걸까?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면서 사회에서 성취하고픈 욕심은 왜 없는 거지? 내 머릿속엔 온통 이런 생각뿐이었다. 참고로 당시 나는 UN대사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리라 하는 당찬 꿈을 가진 여고생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소신껏 발표했던 P도, 당찬 꿈을 꾸며 그녀의 말에 내심 반기를 들었던 나도 모두 정상(?)이다. 단지 인생을 이해하고 삶의 단계를 깨닫기에는 한참 어린 나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현모양처를 꿈꿨던 P가 더 혜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슈퍼우먼 콤플렉스
그리고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남들이 모두 인정하는 '슈퍼우먼'으로 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결단한 것이 말이다.
알파걸을 조장하는 사회, 남의 시선과 체면이 중시되는, 그리고 아직은 가부장적인 잔재가 남아있는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여자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슈퍼우먼'이 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뭐든 잘해야 한다는 완벽주의적 강박이 나를 괴롭혔지만 그쯤은 감내해야 하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도 했다.
다행인 건지 나는 육아를 시작하고나서부터는 풀타임 직업을 그만뒀다. 그리고 주변의 워킹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혹은 처절하게 삶을 영위하는지 목격해왔다. 한 워킹맘의 표현을 빌리자면, '외줄 타기 하는 느낌'이란다. 하나라도 변수가 생기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나날의 연속이라고도 했다.
전업주부라 해도 아이를 보고 살림을 하는 것이 편할 리만은 없다. '노는 인력'으로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언제까지 집에서 놀 거야?'를 참조하시길)
그래서지금 나의 꿈은...
어릴 때 장래 희망을 이야기할 때면 대통령, 의사, 판사 등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격세지감이다. 꼭 뭐가 되어야 하는 시대도 아니고, 된다 해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 시대도 아니게 되었다. 서열과 시선이 중요했던 사회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워진 듯하다.
UN대사를 꿈꾸던 여고생은 직장인이 되었다가 이제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인생을 직업 하나만으로 규정하기에 우리의 나날이 너무나 소중하고 길다.
나의 지금 직업은 육아 집중기에 선택한 '전업주부'라고 해두자.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언젠간 기회가 오겠지. 그것이 꼭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큰돈을 버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이다.
주변에서 말하는 현모양처도,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슈퍼우먼도 아니지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둘을 목표로 하고 싶지 않지만, 나와 가족에게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직업으로 내 삶을 규정짓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