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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6. 2020

7. 캡틴 H의 집에서

돼지를 부탁해

닭을 데리러 간 곳은 캡틴 H의 집. 다랭이논 굽이굽이 내려다보이는 빨간 양철 지붕 집이다. 그의 아버지가 살고 할아버지가 살았던 옛집을 신식으로 고쳐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 캡틴 H는 마을 토박이 농부다. 농고, 농대를 다닌 캡틴 H는 군대를 다녀온 뒤 줄곧 농사를 지었다. 어느새 농부 20년 차를 앞두고 있다. 고향에 사는 이들이 그렇듯, 그도 여러 단체에 소속되었고, 젊다는 이유로 온갖 총무를 맡았다. 안타깝게도 이후로 들어오는 후배가 없으니 ‘만년 총무 기념비’라도 세워야 할 판이다. 문중이라거나, 동문이라거나, 작목반이라거나, 온갖 멤버십이 얽히고 누적되는 곳이 지역사회다. 퇴적된 책임감의 무게가 답답하기도 할 텐데, 성실하게 살아가는 ‘총무 H’였다. 하지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을 오르는 법 아니겠는가. 만년 총무에게도 야망이 있던 것이다. 그 음흉함을 알게 된 이후 나는 그를 ‘캡틴 H’라 부르지 아니할 수 없었다.


대안축산연구회. 그가 바로 이 비밀스럽고 반체제 냄새 나는 모임의 주동자였다. 지난겨울 캡틴 H의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 동물을 키우는 이들 중에서도 그에게 선택받은 이들의 모임이었다. 혁명이라거나, 연구라거나, 대단한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이곳은 충청도 한복판이었다. 에둘러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고, 누구도 똑 부러지게 의중을 말하지 않았다. 속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인지, 혼자 되뇌는 것뿐인지 모를 말들이 오갔다. 어쩌면 그냥 환청을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끈기 있게 모임을 이끌어 간 것은 캡틴 H였다. 뜨뜻미지근함으로 겨울밤을 데워냈다. 평소 쑥쓰럼 많고 웬만해서는 잘 나서지 않는 그에게선 분명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에 축산인이며, 농부인 우리들이 분연히 일어나 지금의 방식과 다른 동물을 기르는 방식을 선도해보자는 결의였다. 농부가 직접 나서보자는 말이었다. 세상은 대안 축산을 필요로 했다. 우리 지역은 이미 축사 포화 지역으로 신규 축사를 짓는 건 어려웠다. 기존 축사를 구입한다 쳐도 너무 비쌌다. 신축이 어려워짐에 따라 기존 축사는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큰 돈’ 못 버는 자연축산을 하기엔 초기 투자비가 너무 크다. 대안축산연구회는 기존의 축산 방식의 변화를 연구해보기로 했다. 근본적인 변화는 어려워도 작은 대안을 찾아보자. 가축도, 사람도, 환경도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실험해보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축산인 스스로의 실험이라니,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의기충천되고 가슴이 뛰었다. 몇개월 뒤, 봄이 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돼지를 키우고 있었고, 정작 충청도 사람들은 뒤에 빠져 있었다. 샌님 홀로 최전방에 서 있다. ‘아, 진짜 돼(뒈)지겠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유기농 쌀을 직접 도정해서 도시 소비자들과 직거래 하는 캡틴 H. 벼를 보관, 탈곡하고, 선별, 포장, 배송, 소통까지, 번거롭고 손 많이 가는 일을 그는 10여년째 하고 있다. 단순 거래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정을 직접 하는 덕분에, 그에겐 덜 여문 쌀 ‘청치’와, 현미를 백미로 만들 때 깎여 나오는 ‘쌀겨’가 많았다. 쌀겨는 누런 쌀가루로, ‘미강’이라고도 한다. 현미 가루다보니 쌀 영양의 대부분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백미를 주로 먹기 때문에 쌀겨가 많이 나왔다. 사람이 먹진 않지만, 그렇다고 바로 퇴비로 만드는 것도 아까운 부산물이다.


다섯마리의 닭이 캡틴 H의 집 마당을 노닐고 있다. 평화로운 농가의 모습이다. 캡틴 H의 여덟살 아들의 양계사업을 위해 데려왔다고. 닭을 통해 청치와 쌀겨도 활용하고, 알도 먹으니 캡틴 H에겐 썩 괜찮은 그림이었다. 달걀 수거와 배달을 맡은 아들에게 판매금 100퍼센트를 배당한단다. 이웃들도 건강한 사료를 먹고 뛰놀던 닭이 낳은 유기농 달걀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집 앞까지 배달해준다니, 말 다했다. 달걀 사업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며 자리를 잡아갔다.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캡틴H는 기뻤다. 자랑하던 그의 모습은 오랜만에 신나 보였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이 모습을 지켜보던 또다른 이가 있었던 것이었다.


한반도 고유종이자 멸종위기종, 바로 삵이었다. “진짜 삵이었다니까.” 대대로 살아온 캡틴 H의 집은 하필 삵의 터였다. “고양이도 아닌 것이 생긴 게 묘하더라니까.”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데 고양이라고 착각했을 리는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정말 묘한 일이었다. 캡틴 H 외에 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면 신(神)의 강림이 아니었을까. 하루 자고 나면 한마리, 다음 날은 두마리, 열댓마리에서 댓마리로 무리가 줄어들었다. 여덟살 꿈나무의 사업장이 삵신(神)을 위한 제단이 되어갔다. 원래는 열댓마리 닭이 있었는데, 겨우 다섯마리가 남았다. 그중 한마리를 돼지우리로 모셔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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