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부탁해
“돼지가 닭도 잡아먹어.” 동네 이모가 말했다. 이모가 어렸을 때 돼지를 키웠더랬다. 제주 흑돼지처럼 뒷간 밑에서 키웠단다. 똥간에 빠지는 것도 무섭지만 돼지가 뒷간 위로 코를 내미는 건 더 무서웠다는데... 그 돼지가 닭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에이, 거짓말~" 나는 믿지 않았다. 이모가 순진한 씨티보이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닭을 데리고 캡틴 H의 집에서 돌아오며 이모의 말을 그제서야 진지하게 곱씹어보았다. “어느날, 돼지 밥을 주러 갔는데 말이야. 그날따라 닭이 따라왔던 거야. 흘리는 밥을 주워 먹고 싶었던 게지. 닭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순간 멍청하거든. 떨어지는 밥을 주워 먹다가 내가 던지는 밥을 따라 뒷간 속으로 따라 들어가 버린 거야 글쎄. ‘푸다닥’ 하고. 돼지는 처음엔 닭에 관심이 없는 듯했어. 그런데 닭을 천천히 구석으로 몰았던 거야. 그러곤... 순식간이었지.” 토끼장에서 떨어진 새끼 토끼도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한다.
옛날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은 돼지를 배에 태우고 다녔다. 식량으로 쓸 요량이었단다. 잔반을 먹일 수 있으면서 번식도 잘하고 성장이 빨랐기 때문이다. 기항지마다 돼지를 조금씩 풀어주기도 했단다. 돌아가는 길에 잡아서 먹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돼지들은 어디서나 적응을 잘했다. 인도네시아의 경계심 없기로 유명한, 도도새의 멸종에 이 돼지들이 한몫을 했단다. 『아기 돼지 삼형제』 같은 동화로나 돼지를 알아왔던 내게 돼지는 약자였지 사냥꾼이 아니었다. 동화 속에서는 늑대 빼고는 모두 친구였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돼지들이 닭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또 하나의 근심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아주 계획 없이 닭을 데려온 것은 아니다. ‘치킨 트랙터’라는 닭장을 만들 생각이다. 치킨 트랙터는 밑이 뚫려 있고, 이동할 수 있는 닭장이다. 닭은 발로 땅을 파고 풀을 먹는다. 그 습성이 땅을 갈아엎는 트랙터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적당한 퇴비와 풀 관리가 땅을 비옥하게 한다. 하지만 닭이 한곳에 오래 머물면 땅을 황폐하게 한다. 똥이 한곳에만 누적되면 부영양화 되고, 땅의 피부 역할을 하는 풀이 없어지면 생물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 그래서 치킨 트랙터는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닭을 키우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의 '폴리페이스‘(Poly-faces)라는 농장에서는 소와 닭, 그리고 돼지를 같이 키운다. 농장주인 조엘 샐러틴은 동물 한종만을 키우는 것도 단작(한가지 종만을 키우는 것) 농사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한다. 여러 가축이 다양성을 통해 상호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자연에 한가지 종만 존재하는 경우는 없다. 다양한 종이 서로 균형을 유지한다. 한가지만 키우(남기)고자 한다면 불균형이 생긴다. 불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억제가 필요하다. 단작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억제는 커지고, 작용이 있으면 그만큼의 반작용이 발생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어느 구역에서 옥수수만 키운다면 옥수수를 좋아하는 곤충의 대량 출몰을 피할 수 없다. 보통의 억제 방법은 살충제다. 결과적으로 살충제는 익충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 더 작고, 더 많은 수의 해충에게는 살충제 내성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농부는 살충제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고, 살충제는 생태계에 유입된다.
대량 단작을 위해 만들어낸 작물이 유전자 변형 생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이다. GMO 옥수수에 적용되는 대표 기술은 두가지다. 하나는 옥수수에 독성 유전자를 넣어 이를 먹는 곤충이 죽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제초제 내성 유전자를 넣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간의 유전자 합성이 안정적인지, 깨져서 생태계에 교란을 가져오지 않을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분분하다. 미국은 GMO 작물 생산을 허용하지만, 유럽은 금지하고 있다.
조금 더 검증된 위험은 생산에 쓰이는 제초제의 독성이다. 제초제를 제조하는 회사에서 제초제 내성 GM옥수수를 개발했다. 세트상품인 셈인데, 이 유명한 제초제 글리포세이트는 세계보건기구에서 2015년에 발암추정물질로 지정됐다. 글리포세이트가 사용된지 40여년 만이다. 옥수수 생산 과정에서 글리포세이트가 생태계에 대량 살포된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90%는 유전자 변형 옥수수다. 우리는 미국산 옥수수를 두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나라다. 동물 사료로 쓰니까, 사람이 직접 먹진 않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GMO의 진짜 문제는 생산 과정에 있다.
폴리페이스 농장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곳은 야생의 생태계를 모방한다. 다양한 동물의 본성에 맞춰 조화롭게 배치한다. 소는 풀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축이다. 하지만 구강 구조상 짧은 풀을 먹을 수 없다. 같은 초지에 계속 살면, 똥을 통해 기생충이 전염될 수도 있다. 닭과 마찬가지로 한곳에만 머물면 땅을 척박하게 만든다. 야생의 소는 계속 이동한다. 닭은 짧은 풀을 먹을 수 있고 벌레를 먹는다. 똥을 파헤쳐 벌레를 먹기 때문에 똥을 흩어주는 기계를 쓰지 않아도 된다. 기계, 약품, 사료 의존성을 줄였다. 외부 의존성을 줄인 만큼 자본이 적게 들고, 대출이 필요하지도 않다. 대출이 없는 만큼 농장은 자유롭다.
조엘 샐러틴은 전체 목장을 여러 구획으로 나눈다. 한 구획에 일정 기간 소를 방목한다. 정해진 기간이 되면 다음 초지로 이동시키고 돼지와 닭이 그곳으로 간다. 순환 방목은 생태계를 풍성하게 한다. 동물의 똥은 토양 미생물의 식량이며, 미생물은 풀의 영양을 높인다. 다양하고 풍부한 영양의 풀은 ‘초원의 샐러드바’를 만든다. 다른 목장에 비교했을 때 생산량도 떨어지지 않는다. 폴리페이스 농장은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동물을 기른다.
비록 책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폴리페이스 농장에 영감을 얻은 나는, 치킨 트랙터를 만들려 했다. 나무 파렛트를 반으로 잘라 밑이 뚫린 삼각형으로 세운다. 철망을 둘러친다. 뚝딱! 간단한 이동식 닭장이 됐다. 너무 빠른 제작이 불안하다. 돼지우리 안으로 치킨 트랙터 입장. 닭장 안으로 닭도 입장한다. 닭장을 사이에 두고 닭과 돼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호기심 가득한 돼지와 멀리 떨어지고 싶은 닭이 서로 쫓고 도망가는 모양이 이어진다. 닭이 벌레를 먹어야 하는데, 돼지를 신경 쓰느라 밥을 못 먹는다. 닭장이 너무 작은 게 문제구나. ‘차차 고쳐나가야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닭이 사라졌다. 피 한방울, 깃털 하나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없어졌다. 돼지일까? 철망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남아 있었다. 족제비 정도의 크기다. 산이 근처라 야생동물이 물어간 게 분명해. 돼지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돼지들은 태평히 낮잠을 자고 있다. 닭이 사라지는 걸 그저 지켜만 봤을 걸 생각하니 한대 쥐어박고 싶다. 사실 돼지들이 닭을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 쥐어박아야 할 건 내 자신이다.
다다음 날, 밭에서 빈 달걀 껍데기 하나를 발견했다. 닭을 데리고 있다는 납치범의 연락일까?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 흔적 없다. 몇주가 지났다. 어느날 돼지 밥을 주고 있는데 조금 큰 산비둘기가 이곳으로 왔다. 헛, 닭이다. 귀신을 보고 있는 걸까. 홀연히 산에서 내려와 돼지 옆에서 밥을 쪼아 먹었다. 산에서 살고 있었다. 돼지와 닭은 서로 관심을 갖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저녁이 되자 닭은 뒷짐 지고 다시 산으로 가 나무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래, 삵신 강림에도 살아남은 꼬꼬댁이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왜 껍데기만 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도 밭에는 달걀 껍데기가 발견됐다.
이와 별개로 어느 순간 파리 떼는 사라졌다. 퇴비장을 만들어 돼지똥을 매일 치워준 덕분 같다. 파리의 원인을 없애는게 답이었다. 사실 삼남매의 똥 치우기는 쉬운 편이다. 돼지는 정해진 자리에만 똥, 오줌을 눈다. 한 터에 머무는 짐승의 본능인 것 같았다(이동하는 동물, 소와 염소는 아무 곳에서나 대소변을 눈다). 위생적일수록 생존율이 높아진다. 똥도 질펀한 똥이 아니라, 고구마같이 단단한 똥을 누었다. 손으로 집을 수 있는 정도다. 빠르게 살을 찌우게 하기 위한 곡물사료는 똥을 질척하게 만들고 냄새도 나쁘게 한다. 질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기를 먹은 다음 날 똥 냄새가 심해지는 것과 같다. 섬유소를 많이 먹으면 냄새가 덜하다.
약품이나 기계를 덜 쓰는 일에는 고생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자연에 대한 이해 말이다. 하지만 고생을 하는 만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니, 이번 고생은 필연이었다고 해야 할까. 씨티보이의 깨달음, 아니 자기 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