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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8. 2020

9. 목구멍이 작아 슬픈 짐승

돼지를 부탁해

'돼지처럼 먹기'는 욕심쟁이를 가리키는 세계적으로 인정된 표현이다. 우리는 이 표현을 듣자마자 특정 이미지-토실토실하고 지저분한 돼지가 구유에서 자기 자리를 고수하며 게걸스레 식사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돼지의 이런 식습관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돼지의 턱은 1차원으로만 움직인다. 그 탓에 돼지는 지저분하게 먹을 수밖에 없다. 돼지는 턱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없는 까닭에 먹이를 소량씩 즐길 수 없다. 이게 입을 벌리고 먹는 성향과 결합하면서 볼썽사나운, 가관이라 할 식사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미의 젖을 물때부터 곧바로 시작되는 경쟁이라는 문제도 있다. …  어린 돼지들은 먹을 것을 두고 항상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돼지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 중


쩝쩝쩝. 와구와구. ‘진짜 돼지같이 먹네’라고 매일 생각한다. 돼지는 많이 먹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음식을 흘리기도 한다. 먹고 싶은 마음에 비해 목구멍이 작기 때문이다. ‘헉푸헉푸.’ 헤엄칠 때 낼 법한 숨소리를 내며 음식을 삼킨다. 간발의 차이로 미처 목구멍 열차에 타지 못한 음식들이 입 밖으로 도로 튀어나온다. 편식 방지를 위해 여러 음식을 섞어주는데, 맛있는 걸 먼저 입에 넣기 위해서 밥을 파헤치기도 한다. 주변은 지저분해진다. ‘푸헥푸헥.' 생각보다 격정의 시간은 짧다. 그러다 밥그릇을 엎어버리기 일쑤다. 다 먹어도 엎고, 반찬 투정할 때도 엎는다. 가장 주요한 이유는 밥그릇 싸움 때문이다.


노약자 배려라거나 양보 같은 단어는 없다. 힘센 돼지가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차지한다. 야생에서 수퇘지는 홀로 다니기 때문에, 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 같다. 축사에서 길러지는 수퇘지는 모두 거세를 한다. 축산 동물의 세계는 짝짓기가 ’외주화’되고, 암컷 선호 사상이 강해짐에 따라 수컷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수탉에겐 그래도 신사적인 면모가 있다. 낯선 이가 오면 빨간 볏을 세우고 무리 앞에 선다. 눈을 치켜뜨고 ”고오, 고오” 하고 낮은 소리로 위협한다. 밥을 먹을 때도 암탉이 먼저 먹고 수탉은 나중에 먹는다. 식욕을 참을 줄 알며, 암탉이 먹는 동안 목을 꼿꼿이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자못 기품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은 아닌 것이고, 사람도 그걸 참작하지 않는다. 어쨌든 사람들은 알 못 낳는 수탉부터 잡아먹었다. 우리 수퇘지의 매너는 어느 정도냐면, 밥 먹을 때 누구라도 얼쩡거리면 사정없이 귀를 물어버린다. 마릿수대로 밥그릇이 있지만, 남의 밥그릇이 더 커 보이는 법칙은 돼지 세계에도 적용된다. 남이 먹고 있는 밥그릇을 감시하러 뺑뺑이를 돌기도 한다.


돼지는 잠을 잘 잤고 많은 시간 잠들어 있다. 먹은 걸 소화하기 위해 하루 13시간을 잔단다. 꿈도 꾸는지, 발버둥 치며 깨기도 한다. 사람이 오면 귀신같이 깬다. 큰 귀가 밥값을 한다. “크헉(밥?)” 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실망하고는) 다시 잠을 잔다. 실망의 한숨은 컸다. 돼지우리에 들어가면 다가와 다리를 툭 쳤다. 일수를 내는 기분이다. "꿀꿀(밥)" 청소부터 하고 싶지만 식사를 먼저 내드릴 수밖에 없다. 밥을 줘야 괴롭힘에서 벗어난다. 그날의 할당량이 부족하면 다시 돌아온다. “꿀꿀(이게 최선이냐!)” 밭에 가서 아껴둔 토마토라도 따와야 한다.


낮잠자는 막내 삼촌을 닮았다




마릿수대로 밥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기본이다. 밥그릇이 부족하던 시절엔 무조건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이라기보단 대장 돼지의 횡포였다. 밥그릇이 여러개가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밥그릇을 동시에 채울 수 없다는 점이다. 첫번째 밥그릇에 밥을 쏟으면 아싸라비야 모두가 달려온다. 우르르. 눈이 빛나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초단거리 육상선수들이 되어 결승선(밥그릇)에 동시 입장하는 순간, 대장 돼지가 다른 돼지의 귀를 문다. “꾸엑!!” 귀를 물린 돼지는 영문을 모르지만, 따질 수가 없다. 황망히 입맛만 다실 뿐이다. 대장이 식사를 시작한다. 푸헉푸헉. 멀찍이 떨어져서 두번째 밥그릇에 밥을 붓는다. 다시 한번 달리기 경주가 시작된다. 밥을 먹던 대장도 달린다. 우르르. 조금 늦게 출발한 대장이 간발의 차이로 늦게... 귀를 문다. 


“뀌엑!”


대장이 새롭게 식사를 시작한다. 다른 돼지들은 아쉬운 마음에 옆에서 입맛을 다시다가 한번 더 귀를 물린다. 다른 돼지들은 이전의 밥그릇들로 간다. 서로 밥그릇에 집중하나 싶었는데, 대장이 다른 밥그릇 순찰을 돈다. 모든 밥그릇이 똑같다는 걸 깨달으면 좋으련만. 혹시나 저쪽에 더 맛있는 게 있으면 어쩌지 싶은 마음 같다. 귀를 물리는 소리가 울린다.


“꾸엣!!”

서열 교육은 밥상머리에서


모든 밥그릇을 확인하고 싶은 대장은 두세 숟가락만 뜨고 다른 밥그릇으로 자리를 옮긴다. 코에 넣다시피 밥을 삼키고 있던 돼지들은 또다시 쫓겨간다. 밥그릇 릴레이는 그렇게 시작된다. 한바퀴, 두바퀴, 세바퀴… 뱅글뱅글. 배가 부를 때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가끔은 쫓겨사는 돈생生에 지친 졸개 돼지가 반항을 한다. 나라고 당하고만 살쏘냐 싶지만, 반항은 바로 처단된다. 졸개는 쫓겨 도망가고, 대장은 굳이 쫓아가서 혼구녕을 낸다. 싹부터 잘라야 한다는 듯 말이다. 유혈사태가 심화될 때 밥그릇이 엎어진다. 아비규환의 풍비밥상이다.


밥을 너무 적게 줘서 그런 걸까, 배가 고파서 이러는 게 아닐까 내 잘못 같기도 했다. 밥은 하루 두번. 그래, 일광욕하고, 목욕하고, 낮잠 자고, 땅 파고, 똥까지 싸느라 바쁘신데 식사 두번은 적을 수 있지.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배고픔이 폭력 사태의 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매일 10리터 통 한가득 싸는 똥을 치우다보면 미안한 마음도 배설됐다(뿌직). 돼지들은 잘 먹고 잘 싸고 있다. 습성이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사람들이 돼지를 탐욕의 아이콘으로 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대장 돼지의 털은 윤기가 흘렀다. 졸개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내 눈에는 얄미웠다. 똑같이 진흙 목욕을 해도 졸개 돼지의 털은 항상 떡져 있었다. 암퇘지의 상황은 조금 나았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졸개 돼지의 털도 멀끔해져 있다. 덩치도 비슷해져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싸움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서열이 안정화되면서 찾아온 평화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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