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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8. 2020

10. 워터파크 개장

돼지를 부탁해

내가 농사짓는 텃밭은 마을 구석, 야트막한 산 아래에 있다. 아침해가 산을 타고 오느라, 볕이 늦게 드는 서향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식물에게 햇볕 한두시간은 차이가 크다. 습기라거나, 온도라거나, 생장 속도가 달라진다. 다 같은 밭 같지만, 해 드는 정도에 따라 자라는 생태가 달라진다. 우리 밭은 양기가 부족하다. 모양도 길쭉해서 트랙터가 움직이기 불편했다. 기계 관점에서 농사짓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덕분에 쉽게 빌릴 수 있었다. 길이 없으니 지나는 사람도 없다. 마을 어르신들의 조언(=잔소리)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어르신들은 서울 샌님이 밭에 꼬부리고 앉아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올 길이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고라니가 다니는 길목이라는 점이다. 고라니 쉼터 같은 곳이었고, 고라니는 밭에서 샐러드바를 즐기고 갔다. 보리순, 상추, 콩잎, 옥수수. 비가 오면 밭 좌우로 지천이 흘렀다. 장마가 지나면 물길을 따라 그늘지고 축축한 식물이 밭을 감싸며 자랐다. 채도가 더 어두워지면서 더 외진 느낌이 들었다. 돼지는 이곳에 있었다.


지천을 건너 마을이 있다. 외떨어진 덕에 돼지도 별다른 간섭 없이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 시설이 없었다. 물은 동물을 키울 때 필수 요소다. 바로 옆이 지천이지만, 수량이 일정하지 않다. 작은 댐을 만들어 물을 가둬볼까도 싶었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댐을 만들어보지만, 비가 오던 날 깨끗이 쓸려갔다. 전기를 멀리서 끌어와야 했던 것처럼, 물은 또 하나의 과제였다.


돼지는 땀샘이 없다. 개와 같은 피부. 따라서 체온조절 능력이 떨어진다. 밤에 활동하고 습지를 찾아갈 수 있는 야생 돼지의 경우, 더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차하면 땅을 파고, 습지를 만들어 진흙 목욕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편이 생존에 유익했을 것이다. 지방이 두텁게 진화했다. 하지만 가축화된 돼지는 멧돼지와 달리 낮 생활을 한다.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돼지들이 맥을 못 췄다. 운동장 위로도 비닐천(가빠)으로 해가림막을 설치했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는 일이었다. 밭에서 제일 좋은 자리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랬던 것이 그만... 해가 가장 잘 들고, 긴 시간 내리쬐는 남향에 돼지우리를 앉힌 것이다. 돼지는 햇볕에 화상을 잘 입는다. 양기는 모두에게 좋은 줄 알았지 뭐야. 돼지들은 밥 먹을 때를 빼곤 조각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잤다. 하지만 체구가 큰 덕에 열을 더 많이 흡수하고, 신진대사량이 많았다. 땅속은 습기가 있고 시원했다. 돼지는 오늘도 코로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누웠다.


돼지의 후각은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인간보다 냄새를 2,000배 더 잘 맡는 덕분에 주변의 온갖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 풀마다 향이 다르고, 각기 다른 나무의 냄새도 안다. 땅속에 있는 식물의 뿌리도 찾을 수 있고, 인간이 심은 고구마도 감자도 그렇게 찾을 것이다. 간혹 나오는 벌레는 맛있는 간식. 돼지의 왕성한 호기심과 다양한 식성, 튼튼한 주둥이, 이 삼박자가 어우러져 ‘루팅(rooting)’이 이루어진다. 돼지들은 나름의 이유로, 어떤 지점을 파고 들쑤셔댔다. 돼지 운동장 곳곳이 패어갔다. 땅파기는 배가 고파서라기보단 욕구를 해소하는 과정 같다. 인간처럼, 동물도 욕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체온조절을 할 수 없는 동물에게 수분 보충은 중요하다. 정한수를 올리듯 매일 물을 떠갔다. 소중한 물을 흘릴까, 조심히 솥에 부어드린다. 매일 20리터 통을 들고나는 일은 쉽지 않다. 임시였음에도 매일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서 빨리 음수대를 설치해야겠어.’ 음수대는 누르면 물이 나오는 밸브와 그 물을 받는 바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바가지가 달린 음수대는 송아지용이다. 소는 물을 혀로 훑어 마시기 때문에 바가지가 필요하다. 돼지용은 바가지가 달리지 않았다. 빨대같이 생겼는데, 물을 빨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바가지 음수대를 설치했다. 음수대에 물을 연결하면 설치가 완료된다. 200리터 물탱크에 물을 채워와 연결한다. 물이 잘 나온다. 돼지들이 잘 쓰는 일만 남았다. 혹시 사용법을 모를 수도 있을 것은 걱정이 들었다. 음수대 옆에 서서 돼지들이 이곳을 쳐다보길 기다린다. 볼라치면 사용법을 선보인다. 이렇게 코로 눌러 물을 먹는거야...라고 시범을 보이지는 않았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온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바가지에 물을 받고, 물을 주변에 뿌렸다. 물 냄새를 맡길 바라며. ‘얘들아, 여기 물이 있다!’ 작은 물장구에 무지개가 떴다. 일주일의 무지개를 만든 끝에 음수대는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 돼지들은 물을 잘 마셨다. 교육이란 이런 맛이구나.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엇, 그런데 생각해보니, 삼남매가 어릴 때는 일반 축사에서 살았다. 음수대가 있을 게 분명했다. 삼남매는 음수대 사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음용수 설비. 200리터 물통과 음수대


그해 봄은 가뭄이 길었다. 기다렸던 장마도 마른장마로 끝나버렸다. 마을에선 밭에 심은 모종이 죽기 일쑤였다. 논은 물 대기 전쟁이 벌어졌다. 물이 필수인 벼농사는 지하수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지하수가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었다. 얕은 관정(지하수)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60미터, 70미터 점점 더 깊게 구멍을 뚫어 물을 쓴다. 


돼지 세마리가 일주일에 150리터 정도를 마셨다. 낮이 더 길어지고 기온도 올라가면서 물 채우는 주기는 더 빨라졌다. 생각 못한 문제도 생겼다. 물탱크 속 온도가 올라가면서 물이끼가 끼기 시작한 것이다. 햇볕은 힘이 셌고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자주 탱크 속을 닦고 새로운 물로 바꿔줘야 했다. 물은 모아둔 빗물을 준다. 지붕 밑에 간단한 거름망을 설치해서 빗물을 모았다. 공기 중의 먼지, 지붕 위의 낙엽이 섞이는 처음 빗물만 빼면 깨끗한 물로 사용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목장에 설치한 3톤 규모의 빗물 저금통이 시의적절하게 돼지를 위한 시설이 되었다. 물이 귀한 시절에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풀로 빽빽했던 운동장은 돼지들이 살고 나서 민둥 땅이 되었다. 폴리페이스 농장처럼 터를 옮기는 실험까진 하지 못했다. 여러해살이의 생명력 강한 풀이 있었지만, 돼지들이 밟고 다지는 데 살아남을 재간이 없었다. 맨흙이 드러난 땅은 더 딱딱해지고, 건조해졌다. 먼지가 폴폴 날렸다. 그러던 중, 진흙 목욕은 우연한 발견이었다. 물을 새로 채우려던 날, 물통에 남은 물이 아까워 운동장에 부었다. “쏴-” 쏟아지는 물소리에 돼지들이 달려온다. 물줄기를 처음 본 돼지들. 물은 흘러 흘러갔고, 돼지들은 물꼬가 이어지는 길을 가만히 본다.


“꿀꿀, 꿀, 꿀” ‘꿀-톡’을 나누며 물줄기에 대한 토론이 이어진다.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 같다. 이게 뭘까? 이내 물을 쫓아가 냄새 맡아보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고, 코로 물길을 막는다. 물은 코를 훑고 흘러갔다. “꿀?(헉?), 꿀(시원하다)!?” 많지 않은 물인데 몸을 파묻는다.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 조금이라도 몸을 닿게 하려 한다. 부비부비. 실개천에서 세마리 돼지가 등을 문지르고 배를 깔고 몸을 문댄다. 이내 물 앞에 다들 마음에 불이 붙었다. 불길은 삽시간에 물 전쟁으로 번졌다. 결말은 역시 싸움이었고, 결론은 대장의 승리였다.


돼지들은 몸집 크기대로 힘이 셌다. 대장 수퇘지, 다음 수퇘지, 암퇘지 순으로 서열이 정해져 있다. 수퇘지 두마리가 물을 독식하는 것이 안타까워 좀더 크게 수영장을 만들었다. 깊고 넓게 파서 물이 많이 담길 수 있도록 했다. 물도 수영장용으로 따로 떠다 부었다. 그럴싸한 수영장이 되었다. 세마리 동시 입장이 되면서 싸움이 없어졌다. 돼지들은 하마가 되었다. 이제 물에서 하루를 보냈다. 밥 먹을 때, 잠시 어슬렁거릴 때를 빼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밥그릇도 수영장을 떠다녔다. 물을 흠뻑 묻히고 나와 개처럼 몸을 털었다. 아이들 웃음소리에 배부르다더니, 돼지들이 물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에 내 더위도 가시는 것 같다. 워터파크 개장!

하마로 진화



 

급할수록 엉덩이부터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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