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부탁해
참으로 샌님다운 시간이었다. 나무 울타리로 할지, 전기 울타리로 할지, 전기는 태양 입자로 만들 것인지, 전봇대에서 끌어올 것인지, 여러 선택이 있었다. 현대인의 불행은 너무 많은 선택지에서 온다더니 신혼집도 아닌 걸, 고민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실 애초에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아기’ 돼지를 상상한 이상 무얼 하든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상상의 결과는 앙상한 전깃줄과 육중한 돼지의 잘못된 만남으로 이어졌다. '전깃줄만으로 돼지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모두 우려를 했다. 나는 환상을 보았고, 사람들은 현실을 보았다.
드디어 개소식 날. 돼지 입식을 위해 친구들이 모였다. 앗?! 저 멀리서 툴툴이형 C도 나타난다. 심장이 굳는 게 느껴진다. 툴툴이형 C는 지나가는 길에 들렀단다. 생전 처음 들른 날이 하필 오늘일 수가 있나. 이것이 어떤 복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돼지를 키워 먹겠다니, 이런 기행을 곱게 봐줄 툴툴이형 C가 아니었다. ‘쓸데 없는 일을, 고생하며 하다니‘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잘해도 본전, 뒤틀리는 순간엔 끝이다. 동네방네 소문이 나는 것은 물론, 평생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하다. ’툴툴툴.‘ 그는 벌써 입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놀릴 생각에 이미 즐거워 보였다. 뒤통수가 따갑다.
나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내 뒤엔 고라니 S가 있었다. 성품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고라니 S. 그건 그의 사슴 같은 집안 내력이었다. 그의 집안은 소문난 선비집안이었다. 실력까지 갖춰 어디든 신출귀몰하는 그는, 사슴보단 고라니 같은 느낌을 풍겼다. 동네에서 웬만한 일은 그의 이름을 대면 해결되었다. 고라니 S는 대안축산연구회의 회장이었고, 이 ‘기행’의 앞잡이로 나는 그의 이름을 팔았다. (하지만 그전의 고장 난 목책기가 그의 창고에서 나왔다는 걸...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농촌은 지금 농기계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다. 고라니 S는 우리 동네 최고 등급의 트랙터를 탔다. 고급스러운 무광 녹색의 트랙터에는 미국 사슴 그림이 박혀 있다. 무지막지하게 생겼는데 세련된 엔진 소리라니. 145마력의 미제 사슴은 제값을 했다. 고라니 S는 미국 사슴과 함께 온 동네를 활개쳤다.
세마리 모두 내보내지 말고 한마리만 내보내서 문제가 없는지 보기로 했다. 100일 평생 축사에서 살아온 돼지가 처음 세상에 나오는 날이다. 정적 속에 돼지가 경계심 가득 천천히 밖으로 나온다. "킁킁."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 냄새를 맡는다. “킁킁." 눈은 사방을 살핀다. 벽 너머로만 맡아오던 냄새를 직접 맡는 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본다는 것을 알아챈다.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눈길을 피해 구석으로 간다. 점점 전기 울타리에 가까워진다. 곧 울타리와 맞닥뜨린다. 돼지는 전깃줄을 탐색한다. 내 마음속 전깃줄은 UFC(격투기) 경기장 줄이었는데, 현실의 줄은 너무나 가냘파 보인다. 어깨에 걸릴 높이지만 위협이 될 것 같아 보이진 않는군. 무시하기로 결정했는지 주둥이부터 줄 밑으로 들어간다. 돼지가 울타리 밑으로 넘어가려 했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딱!”
전기가 튀는 소리다. 돼지 뒤통수가 전깃줄에 닿았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뀌이익!” 뒤통수를 맞고 놀란 돼지가 소리를 지른다. '됐다!' 쾌재가 나왔다. 하지만 기쁨은 짧았으니, 곧 공든 모래성이 무너졌다. 전깃줄만으로는 돼지를 막을 수 없었다. 돼지는 놀라면 뒤로 물러난다고 했다. 그 말을 너무 맹신했다. 돼지 뒤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돼지는 이 고통의 원인을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거 같다. 돼지는 앞으로 달렸다. 울타리 바깥쪽으로 밀고 나갔다. “딱! 딱!” 지나가는 동안에도 전깃줄은 어깨, 엉덩이에 착실히 전기를 쏘았다. 목책기는 돼지를 채찍질했고, 채찍질은 돼지를 더 빨리 달리도록 재촉했다.
돼지가 탈출했다. 이야, 눈앞 깜깜해지기 참 좋은 날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절규하는 것 같았고, 돼지는 달리는 것 같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게 인생 진국이라더니. 진국을 원샷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래도 다행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것 같았지만, 돼지는 멀지 않은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얼떨떨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방향에서 돼지를 쫓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방법이 있다. 여기 모인 사람 모두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다. 다들 동물을 대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필 오늘 놀러온 툴툴이형 C에게마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우린 돼지를 포위한다. 솟아날 구멍이 있기는 돼지도 마찬가지였다. 운명이라는 게 참 세상 절묘하지. 막긴 막는데 몸 바쳐 막고 싶지는 않은 한 사람, 바로 내가 이 자리에 있을 게 뭐람. 돼지는 신통하리만치 나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궁지에 몰린다 싶으면 포위망을 한바퀴 슥 둘러본다. 꼭 내 쪽으로 달린다. 어쩌면 지난날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는 걸지 모르겠다. '지난번 그 껌딱지?'
샌님 탓에 번번이 뚫리는 포위망. 도망가는 돼지와 다시 막아보는 사람들. 하늘은 맑고 보리밭은 푸르렀다. 지난 가을 뿌린 보리는 새싹으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며 불쑥 컸다. 어느새 허리춤까지 자랐다. 봄날의 보리가 일렁인다. 보리밭에 돼지 집을 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자라난 보리를 그대로 돼지 밥으로 줄 생각이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오늘을 기다렸다. 보리에 가린 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보리 물결이 돼지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사사삭." 사람들은 보리밭이 흔들리는 흔적을 쫓았다.
토끼몰이 이야기를 가끔 들었다. 동네 아저씨의 어릴 적 추억담. “눈 내린 산에서 토끼를 쫓았지. 길목에 덫을 놓았어. 콩 속에 청산가리(!)를 넣어 꿩을 잡기도 했어. 아마 나도 그 청산가리를 조금 먹었을지 몰라. 참새를 숯불에 꼬슬려 먹었는데, 살도 없는데 맛이 기가 막힌 거여.” 아,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돼지 몰이, 아니 돼지의 사람 몰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돼지는 사람들을 몰았다. 전기 울타리도 제몫을 다한다. “딱! 딱!” 행여나 돼지가 울타리로 들어올라치면 예의 그 채찍질을 해댔다. 돼지를 안으로 몰아야 한다는 걸 목책기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 전기 좀 꺼!" 착하기로 소문난 고라니 S조차 짜증을 낼만하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욕하지 않는 것이 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얼른 전깃줄을 해체한다. 샌님무상, 이틀 걸려 설치한 울타리가 10분 만에 해체된다. 전기마저 꺼지자 돼지는 밭을 더 넓게 뛰어다닌다. 이곳이 UFC경기장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밝혀졌다. 보리밭에선 재미를 다 봤는지 돼지는 밭을 빠져나간다. 협곡을 건너는가 싶더니 산으로 달린다. 이렇게 산돼지가 탄생하는 것인가... 앗, 산 위에는 농촌 최고의 환금작물, 인삼밭이 있다.
망연자실이다. 하지만 절벽을 오르는 돼지는 충분히 느리다. “훅, 훅." 한편의 초고속 카메라를 보고 있는 듯하다. 무너지ᅟ근 흙비탈을 오르며 용쓰는 돼지의 모습이 하나하나 보인다. 네 다리가 질서 있게 뛰었고, 투실투실 엉덩이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다. 꼬리는 쭉 펴져 있다. 평소 뱅글뱅글 말려 있던 꼬리도 오늘만은 온 힘 다해 주인을 돕고 있는 것이다. 고라니 S가 내 곁을 스쳐갔다. 아니 바람이 불었다고 해야 할까? 덥썩. 고라니 S가 꼬리를 잡았다. 놀란 돼지가 펄쩍 뛴다.
풀쩍풀쩍 제자리뛰기가 이어진다. 산 만난 돼지의 기세는 대단하다. 고라니 S도 만만치 않았다. 어깨너비로 땅을 딛고 자리를 잡은 고라니 S는 그대로 몸을 뒤로 젖힌다. 가파른 언덕도 돼지 편이 아니다. 돼지와 고라니 S의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돼지가 잠시 힘을 푸는 순간, 그러니까 도약과 도약 사이, 고라니 S가 허리를 틀었다. 미처 중심을 잡지 못한 돼지가 땅에 꽂혔다. 내동댕이쳐진 돼지도, 보는 이들도, 고라니 S 자신도 놀랐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돼지는 잘못을 뉘우치며, 돼지우리로 돌아가진 않았다. 상황은 그대로다. 돼지는 보리밭으로 돌아와, 가시덤불에 몸을 숨긴다. “훅- 훅-" 거친 숨을 고른다. 보다 못한 후계자 J가 함석지붕 조각을 가져온다. 후계자 J는 ‘진짜' 돼지를 키우고 있다. 그가 돼지를 잡지 말고 몰아야 한다고 외친다. 듣고보니 그렇다. 굳이 붙잡을 필요는 없다. 집으로 몰아넣기만 하면 된다. 들판을 달리는 돼지를 잡는다는 건, 원시적인 발상이었다. 작전이 통했다. 긴 벽을 마주한 듯, 철판 앞에서 돼지는 빠져나갈 틈을 찾지 못한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우물쭈물한다. 사람들이 길게 서서 길을 만든다. 천천히 돼지우리 쪽으로 몰아 간다. 집에는 다른 돼지들이 꿀꿀거리고 있다. 다른 동료들의 소리를 듣고 돼지가 우리 앞으로 왔다. 문을 지키고 있던 제빵 D가 얼른 문을 연다. 돼지가 안으로 들어간다. 팽팽하던 긴장이 탁 풀린다. 돼지들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서로 꿀꿀거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고라니 S가 답답해할 만했다. 그가 팔 걷고(트랙터를 끌고) 나섰다. ‘곤포 사일리지’를 겹겹이 둘러 돼지 집을 짓기로 했다. 곤포 사일리지는 ‘공룡알’ 혹은 ‘마시멜로'라고도 불리는 목초 덩어리다. 가을 들녘 수확이 끝난 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보리, 목초, 볏짚, 옥수수 등의 소 먹이용 풀을 저장하는 것을 ‘사일리지’라고 하고, 비닐로 감은 것을 ‘곤포'라고 한다. 유산균을 같이 넣어 풀이 썩지 않는다. 김치와 같은 원리로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 비닐로 밀봉한 풀 덩어리다. 축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소에게는 배달음식 같은 것이다. 풀이라고 하지만 하나의 무게가 500킬로그램 이상이다. 무거워 밀 수도 없고, 워낙 단단하게 압축하기 때문에 돼지도 쉽게 뚫을 수 없을 것이다. 농담처럼 나온 말이었는데, 이어놓고 보니 그럴듯한 울타리가 되었다. 하지만 야금야금 파내면 뚫리기 때문에 안으로 전기 울타리를 쳐서 이중벽을 세웠다. 출입구가 없는 게 단점이다. 두 손 짚고 힘껏 뛰어야 나올 수 있는 높이. 수레가 다닐 수도 없어, 울타리를 넘겨 밥을 줘야 한다. 아쉽지만 부족한 부분은 차차 채워나가기로 했다. 이제 겨우 ‘집’이다. 무사히 키울 수 있을까? 산 넘어 산이다.
* 그날부터 고라니 S의 일곱살 아들이 돼지를 보러 왔다. 나무 빠레뜨로 계단을 쌓아 전망대를 만들어주었다(전망대는 밥을 주는 연단이기도 했는데, 위에서 밥을 던져주다보니 제물을 바치는 제단 느낌이 났다). 친구들을 데려와 견학시켜주기도 했다. 친구들 앞에서 제법 점잖게 돼지들을 소개해주었다. 자기 마음대로 돼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콩이, 까망이, 팽이, 중이, 팥... 돼지보다 이름이 많은 이유는 호칭이 매일 바뀌었기 때문이다. ‘진짜’ 돼지를 키우는 또다른 이웃, 후계자 P도 가족과 함께 돼지 구경을 왔다. 수천마리 돼지를 두고 세마리 돼지를 보러 온 것이 자못 황송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