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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1. 2020

3.돈 워리, 맨

돼지를 부탁해

우리 중 가장 건장한 철인 W다. 그는 우리 농촌의 떠오르는 희망, 천길 나락 농업의 미래. 더이상 바닥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암울한 세계로 뛰어든 철인 W. 젊은이들이 몸뚱어리 하나 믿고 귀농한다지만, 그의 몸은 특별했다. 육신의 갑이랄까? ‘육갑’ 철인 W는 키 180센티미터에 몸무게 80킬로그램, 다부진 어깨와 꼭 다문 입술, 어쩐지 신뢰가 가는 찢어진 눈을 가졌다. 철인삼종 경기에도 참가했다는데, 도시 서생이 주를 이루는 귀농인 세계에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유기농사가 일반화된 우리 동네에 제초제를 쓰는 농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잡초는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예초기로 풀을 깎는다. 농번기에 젊은이들은 논둑 풀깎기 알바를 했다. ‘예초기질’이라고 하는데, 철인 W의 예초기질은 예사 예초기질이 아니었다. 천평 논의 테두리를 깎는 데 보통 사람은 두시간이 걸린다. 그 이후로는 점점 느려진다. 기계 진동과 소음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철인은 삼십분이면 충분했다. 무려 담배 한대 피우고 물 한모금 마시고도 말이다. 혼자 네 사람만큼의 일을 했다. 그 앞에서 풀들은 바싹 엎드렸다. 풀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다. 풀깎기 알바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모였고, 풀은 매일 새롭게 자라났다. 예초기질로 트랙터를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철인 W가 람보 Y의 사투에 참전한 것이다. 180센티미터의 태클은 대단했다. 그 뒷모습은 사자와 같았다. 분명 “이 새끼”라고 외쳤음에도 귀에는 ‘어흥’으로 들렸다. 고질라와 사자의 협공이었다. “어흥, 어흥” “캬오!” 꼬리를 잡힌 돼지의 안다리를 철인 W가 후렸다. 뒷다리를 걸어 돼지를 넘어뜨렸고, 그 큰 몸뚱이로 돼지를 눌렀다. 돼지도 백일 평생 철인 W 같은 생명체는 처음이겠지. "꽥!" 대세가 역전되자 졸개들(=나)이 달려들어 숟가락을 얹는다. 이 찰나를 놓치지 않고, 람보 Y가 돼지의 주둥이와 네 다리를 묶는다. 순식간이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실로 지옥의 매듭이라 할 만했다. 돼지도 꼼짝을 못했다. 람보 Y에겐 모두 정해진 수순이었다. 세 마리의 삼위일체 분신술에 구멍이 생기자 둑방은 곧 무너졌다. 


세마리를 차례차례 트럭에 싣는다. 화물칸 한쪽 벽마다 한마리씩 묶는다. 차렷 자세를 너무 격렬히 유지한 탓일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묶는 매듭은 계속 풀린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덩달아 약해진다. 덜컥 막막해진다. 돼지 키우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닐까? 이런 맹수일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돌아가는 길, 자책의 회초리를 든다. 나는 왜 항상 저지르고 나서 현실을 보는 것인가. 이제라도 죄송하다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할까. ‘아오, 왜 벌써 자랑을 해가지고…’ 이놈의 입방정이 나를 또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구나. 자존심 때문에 무를 수도 없다. 트럭이 터덜터덜 도로를 달린다. 


돼지우리 터에 도착했다. 돼지우리는 아직 미완성 상태다. 소를 이동시킬 때 쓰는 철제 트레일러, 이곳을 돼지들의 임시 거처로 쓰기로 했다. 포박된 돼지들을 내려주고 친구들은 (서둘러) 떠났다. 돼지들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씩- 씩-" 거칠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벽 너머 서있는 내게 눈을 부라렸다. 육식주의자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3)

소 이동용 철장. 밑에 타이어를 놓아 쾌적함을 더 했다.


이제 다리를 묶고 있는 밧줄을 풀어야 한다. 친구들은 없다. 철장 안에 있는 것은 돼지와 나. 정확히는 3대 1. 나를 주시하는 돼지들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낀다. 성난 콧바람에 먼지가 날렸다. 밧줄을 끊는 순간 돼지가 물지 않을까 겁이 난다. 낫으로 줄을 끊으려 하지만 오늘따라 녹슨 낫을 가져왔다. 돼지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줄을 자른다. 슥삭슥삭. 옳지, 끊어졌다. 끊자마자 쇠창살 밖으로 점프. 벽에 매달려 돼지들의 동태를 살핀다. 공격 의사는 없어보인다. 완전히 안심할 수 없어 밧줄을 한땀 한땀 끊고 철장 밖으로 탈출하길 여러번. 돼지들은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누운 채 쳐다만 본다. 도망치느라, 붙잡히느라 돼지들도 지쳤던 것이다. 끈을 모두 풀고 멀리서 보니, 이제 어린 돼지 같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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