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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2. 2020

4.샌님의 집짓기

돼지를 부탁해

돼지들이 이사 온 소 이동용 철장에는 아무것도 없다. 쇠창살과 철 바닥, 뻥 뚫린 천장으론 햇볕이 그대로 들어왔다. 음용수 시설도 밥그릇도 깔짚(바닥에 까는 마른풀)도 없다. 돼지는 털이 조밀하지 않아 햇빛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물과 밥을 임시 그릇에 떠주지만, 물그릇은 엎지르기 일쑤였고, 식사 잔해는 바닥을 금세 지저분하게 했다. 질척거리고 냄새가 났다. 잘 키워준다고 데려왔는데, 더 열악한 생활 여건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돼지들의 보금자리에 ‘운동장’을 만들어주려 했다. 동물이 쉬는 터를 운동장이라고 한다. 잠은 철장에서, 생활은 운동장에서 하게 하려는 계획이다. 철장 주변으로 울타리를 둘러 운동장을 만들려 한다. 울타리에는 전기가 흘렀다.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셨는가. 성난 티라노사우루스가 쫓아오는 심장 졸이는 장면을. 그를 막아내는 것은 전기 울타리였다. 고대생물조차 현대 과학 앞에선 속절없는 것이다. 수만 볼트의 전기가 돼지를 탈출하지 못하게 하리라 믿었다. 물론 경험한 바로는 감전된다 해도 다치지는 않는다. 놀라기만 하는 정도. 소 이동용 철장을 통째로 들어 올려 전기 울타리 속에 넣었다. 


돼지를 흙에서 기르고 싶었다. 우리나라 돼지의 99퍼센트는 평생 흙을 밟아보지 못한다. 사방이 막힌 시멘트 방에서 분말사료만을 먹으며 6개월의 생을 산다. 우리 법은 동물을 흙에서 기르는 것을 금지한다. 동물의 똥, 오줌이 지하수나 하천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인간이 돼지를 길들인 만년의 세월 동안 인간과 가축, 자연 사이에 오염은 없었다. 오염은 동물을 과도하게 밀집시켜 키우면서 생겨났다. 돼지는 자신들이 배설한 분뇨의 늪 위에 발판을 놓고 산다. 고농도의 암모니아 가스와 분뇨 먼지 속에서 살아간다. 겨우 6개월 살뿐인데도 도축 시 반 이상이 폐 질환을 갖고 있다.(도축돈에서 관찰되는 주요 호흡기 질병/윤순식, 2015) 


99%의 돼지는 도축장에 가는 날 햇빛을 처음 본다. 무창돈사라는 창문 없는 축사에서 평생을 산다. 돼지는 생물이기 때문에 과도한 밀식은 정신적 문제도 만든다. 먹고 자는 것 외에 허용되지 않는 생활. 개만큼 똑똑하며 호기심 많은 돼지에게, 이것은 이상행동을 야기한다. 다른 돼지를 공격하는 행위는 그중 하나다. 그래서 새끼일 때 미리 송곳니를 뽑고 꼬리를 자른다. 꼬리는 조금 남겨둔다. 물지 못하는 길이가 아니라 건들면 아픈 길이다. 자극에 민감하게 만들어 서로 물지 못하게 한다. 작은 상처가 큰 상처가 되기 쉬운 환경인데다가, 상처가 생기면 값을 제대로 못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습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빽빽하게 살면 누구라도 병이 난다. 돼지들이 자라는 동안 흔한 질병은 설사다. 산업계의 해결 방법은 항생제다. ‘건강한 돼지’가 아니라 ‘더 빨리, 더 많은 돼지’ 사육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무無항생제는 오히려 동물복지에 반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픈 이에게 약을 주지 않는다니, 이보다 무자비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현장에서의 사용량은 감기약 수준의 양이 아니다. 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같은 방의 돼지들에게 항생제를 일괄 투약한다. 전세계 항생제의 70퍼센트는 동물에게 쓰인다. 물론 전통 방식으로 돼지를 건강하게 키우는 농부도 있다. 건강한 돼지가 영양 면에서도 좋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제육볶음을 7천원에 먹으려면 그런 돼지고기는 사용할 수 없다. 서민의 고기라는 호칭은 가장 잔인한 사육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업 규모에서는 생산성을 위해 엄청난 개체 수의 동물을 좁은 우리 안에 가둬 놓고 키우는데, 이러한 환경은 질병의 빠른 확산을 초래한다. 그 때문에 항생제를 통해 병원균을 통제한다. 이러한 관행은 동물의 성장 속도도 높이는 이중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고기 속의 항생제 잔류물은 미량으로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생제는 항생제에 내성이 있는 캄필로박테르와 살모넬라 박테리아의 진화를 부추겼으며, 이러한 박테리아들이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질병을 일으켜 왔다는 훌륭한 증거가 있다. 
                                         <음식과 요리> 중, 해럴드 맥기


그렇다고 한없이 넓은 장소에 풀어놓고 키울 수는 없다. 농작물을 먹을 수도 있고, 영영 떠나버릴 수도 있다. 울타리를 쳐야 하는데, 웬만한 울타리로는 돼지를 가둘 수 없다. 돼지 주둥이는 땅파기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해왔다. 땅을 파서 먹이를 찾거나 상대를 공격할 때 모두 코를 쓴다. 주둥이로 울타리와 땅바닥 사이, 벽과 벽 사이에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비집어 구멍을 낸다. 몸 전체가 통나무가 되어 지렛대처럼 바위도 들어 올린다. 어떻게 만들어야 철벽의 울타리가 될지, 가닥을 못 잡은 채 입주날이 다가왔다. 단순하게 나무 빠레뜨(pallet)를 이어 붙여 장벽을 만드는 것이 속편한 일인 듯했다. 목장에는 사료나 톱밥 등 화물 배송을 받으며 쌓인 빠레뜨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빠레뜨는 무겁고 나무를 일일이 자르는 건 큰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것은?!’ 동네 형의 창고를 뒤지던 나는 ‘전기 목책기’를 발견했다. 목책기는 전기 울타리에 전기를 보내는 기계다. 전기가 흐르는 울타리에 물체가 닿으면 고압의 전기가 통한다. 정전기를 만드는 것이다. 9,500볼트의 위력은 말벌에 쏘이는 느낌이랄까, ‘퍽’ 하고 몽둥이로 맞는 기분이랄까. 전기의 맛은 실제보다 더 큰 고통으로 기억된다. 깜짝 놀라게 되지만 사실 다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500킬로그램의 소도 한번 쏘이면 다시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일반 농가에서는 고라니나 멧돼지 방지용으로 쓴다. 설치가 간단하면서 효과가 크다. 목책기 하나로 15킬로미터 울타리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사람도 똑같이 쏘일 수 있다는 점은 공평하지만 말이다(울타리가 처진 밭을 서리할 땐 조심하자). 외국에선 동물을 초원에 방목할 때 많이 쓴다. 

전기목책기. 코끼리 그림이 의미심장하다.

돼지의 지능은 어떤 부분에서는 개보다 더 발달되어 있다. 그래서 전기 목책기의 효과가 좋단다. 전기에 쏘이면 아프고, 고통은 전깃줄에서 생긴다는 과정을 ‘추론’하고 ‘기억’한다. 학습 능력은 목책기 효과를 배가한다. 대안 양돈을 배우기 위해 견학 같던 곳의 야산 방목장에서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목책기가 창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우주적 시나리오가 앞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전기 목책기로 돼지 울타리를 만들기로 했다.


전기 울타리를 익히 보았다. 내가 일하는 목장에서도 쓰는 장비다. 전기 목책기가 방목장의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1.5m 길이의 쇠막대를 2m 간격으로 땅에 박아 기둥을 세운다. 나일론과 철선을 꼬아 만든 줄로 전체를 두르면, 수 킬로미터 길이의 전기 회로가 된다. 여기에 전기 목책기를 연결하고 코드를 꽂으면 전기가 흐른다. ‘틱틱’ 목책기에서 전기를 보내는 소리가 들린다. 


목책기로 울타리를 하면 되겠구나. 방향은 정했으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전봇대에서 돼지를 키우는 곳까지 전기를 끌어오는 것이 문제였다. 첨단의 장비도 전기가 없으면 말짱 황이다. 전기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고, 가깝게 느껴왔지만, 돼지우리에서 가장 가까운 콘센트까지 200미터는 떨어져 있다.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전하에게 200미터는 별것 아니지만, 전선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을 했다면 전기 연결이 필요 없는 태양광 충전식 목책기를 샀을 것이다. 하지만 (빌린 거지만) 이미 갖고 있는 목책기를 두고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직접 전기를 만들겠어! 이왕이면 무한한 태양빛을 이용해서 만들고 싶었다.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만들어보겠다니, 샌님 제 버릇 못 고치고 또 옆길로 들어섰다. 울타리를 세우다 말고 태양광 발전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교류와 직류, 컨트롤러와 인버터, 전류와 용량, 옴의 법칙… ‘오, 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이잖아?’ 그렇다. 잊고 있었지만 항공과학고를 졸업한 나는 국제항공기구(ICAO)에서 발급하는 ‘항공기 정비사 국제 면허’ 소지자였다. 오늘을 위해 전자기학을 공부한 것이다. 시험과 평가로 점철된 내 고등학교 과정은 헛되지 않았다. 이 정도 내용은 한번만 읽어도 태양광 입자가 반도체를 자극하여 전위차를 발생시키고, 전하가 이동하면서 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 머릿속에 착착, 그려지기는 개뿔. 처음 보는 듯한 놀라움이 나를 놀라게 한다. 결국 전기 전문가에게 문의를 한다. 태양광 발전 패널과 배터리, 인버터의 연결과 작동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차분히 들은 후, 그가 말했다. ‘직접 만들어본다는 점에서 정신건강은 좋아질 것 같습니다.’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냥 사라는 얘기였다.


작전 B다. 태양광 발전은 포기하고 단순하게 가기로 한다. 200미터 전선을 만든다. 철물점에서 전깃줄 200미터짜리 한 롤과 콘센트, 코드를 사서 연결. 이쪽에서 끼우고 저쪽에서 스위치를 올리며 200미터 끝에서 끝으로 왕복하길 여러차례. ‘틱틱’. 콘센트를 꽂자 목책기가 작동할 때 나는 특유의 소리가 난다! 마른땅에 물이 솟는 듯한 기쁨이었다.


이제 전기 목책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할 시간이다. 보아하니 외국 농부들은 센서를 통해 전기가 통하는지 확인했다. 전선에 연결하면 전압이 측정되었다. 쫀쫀한 절연 장갑까지 끼는 선진국의 품격이었다.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한 거 같다. 나는 조금 원초적이며 더 직관적인 방법을 쓰기로 한다. 직접 잡아보기. 내가 측정기다. 감전될 걸 알면서 전깃줄을 잡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0.1초. 내가 가진 용기의 시간이다. 전깃줄을 잡자마자 손을 뗐다. 아니 잡기 전에 손을 뗐다고 봐야지. 이 가상한 간덩이로는 측정이 어려웠다. 하지만 겁쟁이라고 놀려 놓았으니 내게는 뒤가 없다. 오늘 나는 대담한 사람이 되기로 한다.


“어머니!” 눈을 감고 전깃줄을 움켜쥐었다. 찌릿찌릿. 전기… 전기가 온다. 이 맛이다. 잡은 손이 움찔움찔한다. 하지만 너무 약하다. 전기 치료를 받는 수준이다. 전기가 200미터를 달려오느라 힘이 딸린 걸까? 옆에 있던 전동드릴을 작동시켜본다. 아무 이상이 없다... 그제서야 비싼 장비가 창고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 그러니까 버려진 건가. 땡잡았다며 지금껏 들고 다닌 지난 시간들이 스쳐간다. '고장'이라고, 아니면 ‘X’라도 써놓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세상이 나를 속인 기분이다. 하지만 이까짓 일로 삐뚤어질 수야 없지. 목책기를 깨끗이 닦아 제자리에 가져다두었다. 다음 사람을 위해(나만 당할 순 없지 않은가). 긴 시간이었다. 샛길에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물론 솟아날 구멍은 있다. 산짐승들이 전기가 들어오는 밭만 찾아다니는 친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딴곳에서 농사짓는 이들을 위해 태양광 충전식으로 작동하는 목책기가 시중에 있었다. 애초에 이걸 샀으면 좋았을 테지만, 태양광 제품을 써본 적이 없었기에 성능을 믿을 수 없었다는 말은 변명이고, 만만치 않은 가격이 문제였다. 이미 갖고 있는 자재들, 주변에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는 것도 돼지를 기르기로 했을 때 세운 원칙이었다. 인류가 대단한 기술이 있어서 1만년 전부터 돼지를 길러 온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태양광 충전식 목책기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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