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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0. 2020

1.백일 돼지 삼남매

돼지를 부탁해

그해 봄 ‘대안축산연구회’를 결성한 즈음, 돼지를 분양한다는 곳이 나타났다. 축산수업 실습용으로 돼지를 키우던 농업학교다. 암수 한쌍이 있었는데 작년 겨울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겨울 동안 새끼들이 무럭무럭 자랐는데, 축사가 가득 차서 새끼들을 분양하기로 했다고. 이런 소식이 내게 오다니. 말로만 듣던 우주의 기운일까? 바로 연락을 취했다. 학교는 내가 돼지를 잘 키울 수 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계 날짜를 재차 확인하는 것을 보니 사정이 급한 눈치였다. 암수 새끼 한마리씩 받기로 했다. 이사 날짜를 정하고 그에 맞춰 돼지우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돼지 사육 지역에 살지만, 60만마리 중 한 마리의 돼지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돼지들은 샌드위치 판넬로 만들어진 집, 입구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 축사에 산다. 물론 돼지를 키워본 적은 없다. 키울 보금자리가 있던 것도 아니다. 이제 만들어야 했다. 막연한 자신감은 넘쳤다. 돼지우리를 머릿속에서 짓는 것과 현실에서 짓는 것은 달랐다. 한달여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돼지우리 터는 빈 땅 그대로였다. 그러는 사이 분양받을 돼지가 두마리에서 세마리로 늘어났다.


“어차피 키우는 거 두마리나 세마리나 똑같잖아요. 부탁할게요.”


돼지우리를 얼른 비우고 싶어하던 학교였다. 부탁까지 하는데, 거절할 수야 없지 싶었다. 상황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문제를 부른다. 받고 더블로 가는 곳에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깨닫지만 두마리와 세마리는 큰 차이가 있었다. ‘기껏해야 송아지 정도겠지.’ 젖소목장에서 일하는 깜냥으로 예단했다. 나는 목부牧夫(목장에서 소를 돌보는 사람)였다. 송아지는 30킬로그램으로 태어나 100일쯤 100킬로그램이 된다. 대단한 성장 속도. 하지만 크다 해도 송아지는 아기(아지)였다. 송아지는 100일이 되면 젖을 떼는데, 젖을 먹는 축사에서 젖을 먹지 않는 우리로 이사를 갔다. 이때 우유병을 물려 어르고 달래면 언덕을 넘어 원하는 곳까지 데려갈 수 있다. 다 크면 500킬로그램 거구가 되지만 성질은 순하다.


‘그까짓 돼지’라고 얕본 게 틀림없다. 사실 돼지라고는 일요일 아침 「TV 동물농장」에서 본 미니 돼지가 다였다. 경험의 똘레랑스를 발휘해보자면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 정도. 무려 말하는 돼지였다. 의인화된 꿀꿀이가 내가 갖고 있는 돼지의 상(像)이었다.


돼지는 8개월이면 어른이 된다. 임신을 하고 새끼를 낳을 수 있다. 1킬로그램으로 태어나 16주 만에 75킬로그램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백일 지났어요”라는 말에 ‘두 손으로 번쩍 들 수 있는’ 아기 돼지를 떠올렸다. 젖소목장에서밖에 일해보지 못한, TV로 동물을 배운 씨티보이의 한계였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고, 앞날을 보지 못하면 마음이 편한 법이다. 별다른 부담이 없었고,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선에서 준비는 마무리되었다.

돼지를 분양받기로 한 날이 됐다. 빨간 목장갑과 밧줄을 챙겨 트럭에 탄다. 선생님은 해맑게 웃는 나를 축사로 바로 안내했다. 창고같이 생긴 회색 건물. 방화문을 열고 들어간다. 축사는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긴 복도가 펼쳐졌고, 왼쪽마다 방이 있다. 천장에는 거미줄이 먼지를 포집하고 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동굴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킁, 킁, 킁.’ 빠르고 낮은 스타카토의 울음. 눈이 차차 어둠에 적응했고, 그림자 사이로 검은 형체가 보인다. 낯선 이들의 등장에 검은 형제들이 흥분해 있었다.


내 생에 첫 ‘백일 돼지’였다. 빽빽하고 억센 털. 검은 털은 몸을 충분히 더 커 보이게 했다. 그 속으로 크고 찢어진 눈이 보인다. 생애주기로 보면 사춘기쯤을 지나고 있는 돼지들은 질풍노도의 기세를 뿜어댔다. 극악스러운 실험을 견디다 못한 동물이 인간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한다는 영화를 본 것 같다. 영화가 어떻게 끝났더라… 결말을 기억해내고 싶지만, 선생님은 어서 빨리 교무실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돼지방으로 연결된 쇠문을 말없이 연 이유가 또 뭐가 있겠는가.


‘괜찮아. 덩치만 컸지 아직 세상 구경도 못해본 풋-돼지들이야.’ 스스로 다독여보지만, 오금이 저리는 것을 숨길 수 없다. 멧돼지를 만나면 위험하니까 산나물을 뜯을 때는 꼭 두 사람 이상이 가야한다고 동네 이모가 말한 적이 있다. 이건 운명이다. 그때 코웃음 쳤던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녀석 말이다. 자자, 손님들이 모두 온 것 같으니, 행사를 시작해볼까. 백일 돼지들이 ‘백일 잡이’를 시작하려 했다. “선생님, 아기 돼지는 어디에...?” 돌아본 곳엔 아무도 없다. 선생님은 교무일이 바쁜지 축사 밖으로 나갔고, 안전을 위해 문을 꼭 닫으셨다. 찬바람이 등골을 스친다.

"그래, 얘기는 많이 들었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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