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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0. 2020

2.함정에 빠진 건 아닐까요

돼지를 부탁해

람보 Y가 나설 차례다. 나도 아주 준비 없이 간 것은 아니다. 장정 네 사람에 람보 Y를 섭외했다. 나와 또래인 람보 Y는 Y대학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산골에서 돼지를 키웠던 돼지 전문가다. 돼지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도축에서 가공까지, 돼지의 전 생애를 거쳐온 람보 Y. 얼마나 많은 돼지가 그의 인생에 있었는가. 이제는 손을 씻고 친환경 농부가 되었다.


마음을 다잡았다지만, 매사 거침없는 람보 Y의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는 보안경을 쓰지 않고 예초기를 돌리곤 했다. 그건 ‘절대 금지'를 ‘겁쟁이’라고 읽을 때나 할 수 있는 행실이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칼날에 부딪친 돌멩이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에 보호장비 없이 예초기를 돌리는 일은 위험하다. 날아간 돌멩이 때문에 자동차 유리창이 깨지기도 한다. 2행정 엔진의 굉음과 매캐한 연기 속에서 펼쳐지는 풀과의 육탄전. 갈갈이 찢어진 풀이 튄 그의 찌푸린 얼굴은 상처 입은 맹수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예초일을 하다 쇳조각이 눈에 튀었다는 것이다. 새벽에 응급실에 다녀왔다는데, 안약 몇 방울로 다시 눈을 떴단다. 그 사건 후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는 풍문이다. 이제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예초기를 멨다. 한여름에도 청바지를 입는 그는, 오늘도 청바지를 입고 왔다.


람보 Y가 '코걸이'를 꺼냈다. 돼지의 힘은 코로 모인단다. 다른 동물들이 빠르게 달리거나, 뿔을 가진 것처럼 돼지 코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 두툼한 몸체에 비해 다리가 가냘프지만, 코와 함께라면 돼지는 작은 굴삭기가 된다. 땅을 팔 때는 콧구멍을 닫을 수도 있다. 거꾸로 코를 잡히면 제압당한다. 코걸이는 이런 돼지의 특성을 이해한 발명품이다. 피아노 줄을 동그랗게 만들어놓은 작은 고리인데, 당기면 죄이고 밀면 풀리는 단순한 구조다. 정식 명칭은 코 보정기. 이 고리를 돼지 입에 대고 살살 건드린다. 돼지가 줄을 무는 순간 손잡이를 당겨 고리를 조인다. 고리는 콧등과 이빨에 걸리게 되고, 뒤로 당겨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당황한 돼지는 뒷걸음치지만, 당길수록 코는 더 조인다. 앞으로 가는 것이 고리를 푸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돼지는 본능상 당황하면 뒷걸음을 친다.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도 파도를 타듯, 움직임을 맞추면 절대 풀리지 않는다.  


코 보정기. 빠큐 아님..

하지만 돼지는 코걸이를 물지 않았다. “멧돼지 피가 섞인 돼지예요.” 선생님이 말했다. 이 무슨 이순신 장군님 동상이 매일밤 굴렁쇠 굴리는 소리인가. ‘그것 참 농업학교다운 전설이군요’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거 같다. 돼지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유전자 검사가 필요 없는 외모였다. 흑돼지들은 전사처럼 보였다. 뜨거운 열기가 축사를 채웠다. 람보 Y의 이마에 땀이 흐른다. 몇번의 기회가 오고, 몇번의 실패가 이어진다. 돼지는 닫힌 입을 열지 않는다. 돼지는 묵비권을 행사했고, 입을 다물면 코걸이도 소용이 없다. 람보 Y의 평정심이 흔들리고, 다같이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빠져든다. “꾸욱 꾸욱”, “킁킁” 돼지 소리만 축사에 울린다. 지하감옥을 연상시키는 방은, 도망치는 이에게는 좁고, 쫓는 이에게는 넓다. 나는 어쩐지 이곳이 좁게 느껴졌다. 긴장이 절정에 달한다. “꿱!” 돼지가 비명을 지르고, 세 마리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달린다. 우두두두. 그러곤 구석으로 들어가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뜀박질. 우다다다. 분신술을 부리듯 한데 뒤섞인다. 누가 누구인지, 누구를 쫓던 길인지, 누구를 쫓아야 할지 모르겠다. 우두두두. 


"콰광!"


본능상 후퇴


왜지? 축사 철문이 부서졌다. 돼지를 포함한 모두가 열린 문을 쳐다본다. "막아!" 람보 Y가 외쳤다. 대혼란. 이곳에 갇힌 것은 돼지인가 나인가. 돼지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닐까. 돼지의 육덕진 기세에 쫄린다. 아까 영화의 첫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영화는 보통 처음 등장하는 인간은 죽는 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용기를 짜낸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장 가까운 벽으로 달려간다. 나는 벽에 등을 밀착하고 용맹한 차렷 자세를 유지한다. 그대로 껌딱지로 빙의. 

 

귀엽게 그려버렸다. 실수

람보 Y가 코걸이를 집어 던진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작전 변경이다. 8밀리미터 PP로프를 가져온다. 웬만해선 끊어지지 않는다는 공포의 나일론. 그는 천천히 매듭을 만든다. 아, 저것은 지옥에서 온 매듭법! 람보 Y는 오직 한마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한다. 땀이 들어간 눈이 시큰하다. 소문의 레이저를 볼 것만 같다. 완성된 매듭을 돼지에게 살짝 건다. 다리에 걸릴락 말락, 목에 걸릴락 말락, 걸리지 않는다. 애달픈 매듭이 허공을 맴돈다. 보는 이들의 탄성이 터져나온다. 마지막 인내가 바닥났다. 람보 Y가 밧줄을 내던진다. 와락! 달려가 돼지 꼬리를 잡는다. 람보라면 역시 기승전-육탄전인가. 전문용어로 이판사판. “꾸엑!!!” 놀란 돼지가 소리를 질렀다. 한 옥타브 높아진 비명이 머리를 때린다. 어쩌지 저쩌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예상치 못한 사태다. ’아오, 이것들이 정말!‘ 더이상 참지 못한 나는 그대로 '용맹한 발-동동-구르기'를 껌딱지에 연계한다. 그때다. 그림자 하나가 번개같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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