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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12. 2020

프롤로그_육식주의자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돼지를 부탁해

어린 시절, 아빠 모임에 따라가던 날의 흥분을 기억한다. 그날이 오길 기다렸고, 더 자주 모이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어른들의 세계는 고기를 먹는 곳이었다. 회식에서 돌아온 아빠에게선 고기 냄새가 났다. 오늘은 돼지갈비인가? 간장이 졸아든 달달한 냄새를 맡으면, 지글거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고기뷔페’라는 것이 생긴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리필’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중학교 시절에는 ‘생고기 2,500원’ 식당이 생겼다. 이제 부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 고기를 먹으러 가는 것이 문화가 되었다. 어른이 된 기분이랄까. 군대에서는 매끼니마다 한가지 이상 고기반찬이 나왔다. 자취시절 주 메뉴는 제육덮밥과 순대국밥. 점심에 제육을 먹으면 저녁에는 국밥을 먹었다. 아니면 그 반대로.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군인으로 10년. 운이 좋아 또래에 비해 직장생활을 이르게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다니며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농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뒤 귀촌을 했고, 어느새 7년이 흘렀다. 귀농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신선한 공기,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살아보니, 그런 것들은 옛날 옛적 동화에나 남아 있는 상상의 세계였다.


농촌은 도시가 커지는 만큼 피폐해졌다. ‘내부 식민’이라고, 사회학은 정리하고 있었다. 농촌은 도시로 젊은이와 식량을 보냈고, 도시는 농촌으로 혐오시설과 쓰레기를 보냈다. 석탄과 핵 발전소, 폐기물처리장, 화학공장 등 기피시설이 왔다. 축산업도 그중 하나다. 내가 이주한 지역은 하필 국내 최대 축산단지였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돼지와 산다는 건, 사료를 싣고 오는 차, 돼지를 싣고 가는 화물차들이 종으로 횡으로 달리는 동네라는 말이었다. 안개 낀 아침은 분뇨냄새의 아침을 뜻했다. 새봄을 알리는 징표가 ‘파리’라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생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귀 얇은 나도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채식은 만만하지 않았다. “라면에도 고기가 있다고요?!” 채식에 대해 잘 몰랐는데, 시작하고 보니, 세상은 지뢰밭이었다. 이런 나를 두고 부모님은 고기 사 먹을 돈도 없느냐며 혀를 찼다. 도시 친구들은 내게 채식의 이유를 물었다.


국가는 축산업을 꾸준히 키워왔다. 보조금과 면세의 쌍두마차가 이를 견인했다. 육류 소비량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어떤 이는 “덕분에 농촌 경제가 돌아가”지 않느냐고, “값싼 고기를 먹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최근에는 ‘한우 축제’라는 것까지 생겼다. 소비를 늘리고, 브랜드를 만들어보려는 행정의 노력이다. 무대를 세워 가수도 부르고 풍악을 울리지만, 그 뒷모습은 참담하다. 가축은 늘어왔지만 인구는 꾸준히 줄었다. 악취 민원은 계속되고 주민 갈등은 심해졌다. 지역은 축산인과 비축산인으로 분열됐다.


축산업의 폐해는 악취로 끝나지 않는다. 값싼 고기를 만드는 구조는 열악한 노동환경, 지하수 남용, 가축용 항생제의 수생태계 교란, 막대한 온실가스를 남겼다. 건강 악화로 인한 국가 보건비용 상승도 빼놓을 수 없다. 채식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채식 생활은 꽤 오래갔다. 채식이라는 게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쉬웠다. 들과 밭에는 제철 나물, 채소가 넘쳐나고, 신선한 채소는 맛있다. 직접 요리하면 어쩐지 더 맛있고, 기름이 들어가면 그냥 다 맛있다. 참으로 성스러운 삶이었다. ‘이만하면 천국 가겠다’ 싶었다. 내친김에 모태신앙 출신인 나는 제 버릇 못 버리고, 이 구원을 만백성에게 전하고 싶었다. 땅끝까지 구원의 첨병이 되리라. 하지만 가까운 친구조차 전도시키지 못했다. 가공식품과 외식 중심의 도시생활자에게 채식은 어려운 선택이었다. 평생의 고기 습관을 갑자기 끊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은 텔레비전을 틀건 유튜브를 틀건 먹방이 나왔고, 중심 소재는 고기였다.


책 『마당을 나온 암탉』 이야기는 농장에서 시작된다. 암탉 ‘잎싹’이 평생 살았던 농장은 산란 농장이다. 닭은 산출 공식에 따라 알을 낳는 수단으로 산다. 산란 효율이 떨어지는 시점에 닭은 폐기되고, 새로운 닭이 그 자리를 채운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빽빽이 넣었고, 닭은 날개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공간에 산다. 필연적으로 진드기가 생겨 살충제를 뿌려야 한다. 2017년 이슈가 됐던 ‘살충제 계란’의 다른 이름은 ‘공장식 축산’이다. 농장을 뛰쳐나오고 싶었던 것은 잎싹만이 아닐 것이다. 잎싹은 농장을 나와 마당으로, 마당을 나와 야생의 저수지로 모험을 떠난다.


잎싹은 ‘마당’을 동경했다. 자유와 생명이 있는 곳!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동물농장은 아마 마당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산타는 없다. 안타깝게도 ‘진짜‘ 농장 대부분은 공장식이다. 현실을 조금 고려해본다면, 그래도 유기축산 농장이 ’마당‘에 가까운 모습일 것 같다. 유기축산은 동물에게 유기농(=건강한) 사료를 먹이고, 동물을 약이 필요 없는 쾌적한 환경에서 키우는 것을 말한다. 가축의 건강한 분뇨는 먹이를 기르기 위한 퇴비로 되돌아간다. 순환이 이루어지는 농사이다.


애석하게도 현실 ‘마당‘은 세상에 별로 없다. 유기축산 인증은 까다롭고 유지하기 어렵다. 안정된 판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내가 우리나라에 1% 밖에 없는 마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아차, 입사다. ’마당쇠‘ 생활은 흥미로웠다. 우유를 짜고, 똥도 치우고, 갓 태어난 송아지도 돌보았다. 동물을 돌보는 일은 시간이 참 잘 가는 일이었다. 채식주의자로서의 목장생활은 어쩐지 스파이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무튼 내게 마당쇠 생활은 채식과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농촌을 지키기 위해 채식을 시작했던 것처럼, ’마당‘을 돌보는 일도 농촌을 지키는 일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은 불편했다. 마당에 가까운 것이 ’마당‘일 수는 없었다. 양심적인 목장이었지만, 생명을 통해 돈을 버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국내에서 자급할 수 없는 건초를 수입해서 먹여야 했고, 초식 동물인 소에게 일정한 곡물을 먹여야 했다.


자연양돈에 대해 들은 것은 그즈음이다. 돼지의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 사육. 깨끗하고 적정한 크기의 축사. 돼지들은 땅을 파고 놀며, 농가에서 부산물로 만든 사료를 먹으며 천천히 자란다고 했다. 견학을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농촌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존중 받으며 자란 돼지였다. ‘이 정도로 기른다면 먹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예의를 갖춘 고기랄까. 채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곰아, 나는 네가 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란다. 나도 먹고 살려면 너를 쏴야 해. 죄가 되지 않는 다른 일을 하면 좋겠지만 … 할 수 없이 사냥을 하고 있단다. 너도 곰으로 태어난 게 업보라면 나도 사냥꾼인 것이 업보다. 곰아, 다음 생에는 곰으로 태어나지 마라.”

                                                              <나메토코 산의 곰> 중, 미야자와 겐지

ㅡ이 정도의 예의갖는다면         


예의 갖춘 농장의 돼지를 눈앞에서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세상은 넓고 좋은 농장은 어디나 있는가보다. 돼지의 꿀꿀거림은 행복 그 자체였다. 이런 농장은 꿈과 희망 속에서나 있을 줄 알았다. 돼지를 키우려면 어쩔 수 없다고들 했다. 동물에게 예의 차리는 일은 취미로나 가능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이 현실에 버젓이 존재했다. 돈 많은 사람만 즐길 수 있는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이렇게 키운 돼지를 먹는 것은 동물을 위한 일이 아니라, 실추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고기(귀)한 기회 같아 보였다.


그렇게 결론이 났다 싶었는데, 생각은 다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돼지가 행복했다고 하더라도 돼지를 잡아먹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동물의 본성을 억압하지 않는 사육을 ’동물복지‘라고 하는데, 살고 싶은 것이 본성 아니겠는가. 결국 잡아먹힐 거라면, 살아있는 동안의 행복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육식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에도 의문이 생겼다. 답을 찾고 싶었다.


어느덧 마당쇠 4년차가 되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나는 동충하초가 피어나듯,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몇몇 젊은이들이 모여 ’대안축산연구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대안축산연구회‘는 개인들의 동아리였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축산인이자 유기농부들이었다. 비록 축산을 하고 있지만 축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은 유기농과 공장식 축산이라는 모순이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공장‘이라는 오명으로 실추된 농장의 위상을 되찾고자 했다. 또다른 ’잎싹‘이 살아가는 농장을 ’마당‘으로 만들어보고자 모였다. 자유와 생명의 농장으로.


결국 나는 돼지를 직접 키워보지 않고는 안 될 지경이 되었다. 1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세마리 돼지를 키우고, 돌보고,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내게 왜 돼지를 키웠냐고 묻곤 했다. 이 글은 세마리 돼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운명이랄 수도 있고, 인생의 덫일 수도 있는 한편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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