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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26. 2020

15. 회상_처음 돼지를 잡던 날

<내 손으로 만드는 햄, 소시지, 베이컨 워크숍> 후기


ㅡ 육식주의자도 구원 받고 싶다


전국귀농운동본부 주관으로 매년 열리는 <내 손으로 만드는 햄, 소시지, 베이컨 워크숍>. 이 과정은 돼지 한 마리를 가공, 시식까지 2박3일 간 이른바 '통-소화'를 한다. 2018년 교육에 참여 후기.

.........  

햄, 소시지, 베이컨(이하 햄소베)은 각각 안심과 등심, 잡고기와 껍데기, 삼겹살과 갈비살로 만든다. 48시간 이상 숙성하면 좋다. 양념에 잰 고기를 용도에 따라 포장한다. 햄은 셀로판지에, 베이컨은 포장없이 그대로, 소시지는 재료를 모두 갈아 식용 콜라겐 껍데기에 넣는다-본래 소창을 쓰지만 우리는 순대 껍데기에 썼다. 만들어진 햄소베 모두 훈연통에 건다. 너무 뜨겁지 않은 연기를 낸다. 


한바탕 놀다보니, 문득 어느 깨달음이 뇌리를 친다. 돼지 잡는 날은 잔칫날일 수밖에 없었겠군. 큰 돼지를 홀로 손질(소화) 할 수 없어, 남녀든 노소든 여러 손이 함께 한다. 뜨거운 물이 필요하고, 불은 나무에 피워야 제맛. 모닥은 원시의 마음을 깨우고, 인간은 불가에 모여 선다. 지글지글. 고기를 얹으니 불도 혀를 날름날름. 미안했던 마음이 살아나고 다물었던 입들도 열린다. 염라대왕 있는 저승까지 갈 것 없이, 다른 생명을 취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조그만 변명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공동체를 위한 제물이라는 최소한의 예의 말이다.


우리 시대는 더이상 햄소베를 만들지 않는다. 고기도 비닐에 쌓인 상품으로 만난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을 일 없으니 돼지에게 미안할 일도 없다. 햄소베 속 화학첨가물의 해로움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천연재료에 대해, 좋은 고기에 대해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겨우 건강이 아니었다. 햄소베를 먹고 나누던 시간은 말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맛에 대해. 왁자지껄 불가에 모여 앉는 맛, 손맛, 나눠먹는 맛, 지혜와 배움의 맛, 고되고 번거로운 맛, 한 생명을 온전히 취하는 맛, 그러니까 생명이 '사는' 맛 말이다. 더 갖기 위해 우리가 치른 값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이 중요한지 잃어버린 우리 삶, 인간성의 상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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