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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26. 2020

15. 하루 전, 포박

돼지를 부탁해

도축 하루 전, 돼지를 미리 묶어두기로 했다. 죽을 때 받는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주고 싶었는데, 문제가 있었다. 돼지들의 덩치가 컸다. 그전에 경험했던 어떤 돼지보다 컸다. 크기만한 게 아니라, 야생의 전투력이 느껴졌다. 큰 돼지를 한번에 기절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잡는 날 묶으려 한다면 흥분할 것이 분명했다. 관계가 안정화되면서 잊고 지냈으나, 돼지를 데려오던 날의 괴력이 떠올랐다. 내가 준비하고 있는 방법은 망치로 기절을 시키는 방법이다. 흥분한 돼지 정수리를 정확히 때리는 것은 어려운 기술이었다. 아니, 애초 흥분시키지 않는 게 진짜 기술이겠지. 기절이 늦어질수록 돼지의 고통은 커진다. 따라서 하룻밤 미리 줄을 매어두면 진정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묶는 순간은 흥분하겠지만, 하룻밤 지나면 돼지도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기절시킨다.


연구에 의하면, 통각으로 느끼는 고통은 돼지도 인간도 같다. 하지만 인간처럼 상상에 의한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미리 생각한다거나, 걱정으로 인한 고통은 없다고 한다. 빠르게 기절을 시키면 최소한의 고통으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포박이 아니라 이동 범위만 제한하는 정도로 묶는다.


좋다. 하지만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돼지 몸에 밧줄은 어떻게 묶어야 하나. 전화 한통이면 람보 Y는 달려오겠으나, 이 일은 내가 해야 했다. 여러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작전 1은 덫을 놓는 방법이다. 매듭을 바닥에 놓고, 돼지가 그 매듭 속으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만화스러운 장면에 나는 살짝 들떴다. 하지만 매듭을 놓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돼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작전 1은 못 들은 것으로 해두자. 외면당했다고 생각하자 오기가 생겼다. 돼지 발을 잡고 직접 줄을 묶고 싶은 마음이 끓었다. 하지만 무서웠다. 우리가 만난 지 몇개월이나 지났지만 발을 잡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다. 발을 잡았을 때 돼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도축 안내서에는 ‘귀를 잡아당기면’ 돼지를 제압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쌈배추 한장 크기의 귀를 보았다. 귀는 속세에 관심 없는 듯 평화롭게 흐느적거리고 있다. 저 퍼덕이는 귀를 잡아 땅으로 끌어내리면 고꾸라진단 말이렷다. 책을 덮고 잠들기 전 여러번 상상했다. 오늘이 오기까지 상상 훈련을 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귀를 비틀어 땅으로 당긴다. 제압 성공. 귀를 잡고 땅으로… 잡아서 땅으로… 초등학교 시절 내 귀를 잡아당긴 선생님 꿈을 꾸었다. 


완벽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 임하려니, 나의 충복 오른손이가 선뜻 나서지 않는다. 산돼지 후예라고 하지 않았나. 저런 애들은 눈치가 빨라서 닿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나를 낚아챌 거야. 이 자리까지 어떻게 왔는데, 여기서 절단 날 수는 없잖아. 겁먹은 오른손이를 팔이 등 떠민다. 돼지 귀에 살짝 닿는다. 톡. 반응이 없다. ‘그래, 우리 사이에 귀 정도는 잡을 수 있잖아.’ 용기를 내어 살짝 쥐어본다. 마른 오징어 같을 줄 알았는데, 삶은 양배추처럼 보드랍다. 우리의 첫 스킨십. 거친 것만 같은 너에게도 이런 보드라움이! 신기함과 므훗함을 느끼는 찰나 돼지가 눈을 치켜든다. 에이 깜짝아. 놀란 가슴이 탈출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미처 비상연락망을 받지 못한 오른손이가 손을 놓지 못했다. 얼결에 돼지 귀가 끌려 온다.


“뀌웩!” 작금의 상황이 어이없는 돼지가 소리를 지른다. 바로 옆에서 들으니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돼지 비명은 110데시벨까지 되는데, 이는 비행기 소음에 버금가는 크기다. 귀가 아프다. 그렇지만 돼지가 뿌리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용기를 내어 조금만 더 당겨본다. 


“꾸웨엑-"


소리는 더 커졌으나, 돼지는 더 꼿꼿이 선다. 이제 귀를 비틀어 땅으로 내리꽂으면... 꽂으면.... 힘을 줘보지만 돼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기, 책에는 ‘넘어간다’고 쓰여 있걸랑요. 돼지에게 책을 보여줘야 하나. 혹시, 지금 놀라 자빠진 것을 넘어간 거라고 하는 건가. 그래, 비유인 거 같다. 돼지가 가만히 있긴 하니까. 대충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아차, 하지만 자빠진 걸로 친대도 돼지를 묶을 손이 없다. 역시 책을 가져왔어야 했나. 오른손이는 귀를 잡느라 바쁘다. 왼손이는... 왼손이는 혼자서 줄을 묶을 줄 몰랐다. 이거 낭패다. 그러니까 평소에 연습 좀 해두라니까. 언제까지 남의 줄이나 잡아주면서 살려고 그러냐. 잘난 네놈 뒷바라지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놈아. 양손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것이었다. 아차, 너무 내 일에만 집중했다. 뒤를 방심했다. 다른 돼지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른 돼지들은 무관심하다.


후, 귀는 잠시 내버려두기로 한다. 벽에 걸어두었던 ‘코걸이'를 가져온다. 철컥철컥. 비장하게 작동상태를 확인한다. 보기만 했지, 실천은 처음이다. 람보 Y를 기억하며 그의 기운에 접속한다. 성큼성큼 돼지에게 돌아간다. 단번에 귀를 잡는다. 


“뀌엑!" 돼지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돼지 입에 코걸이를 넣는다. 코걸이 상태로 벽에 건다. 이제 두 손이 자유롭다. 진즉 이렇게 할걸. 돼지 발을 들어 줄을 묶었다. 돼지를 묶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처음엔 목을 묶었다. 목은 티셔츠를 벗듯, 손쉽게 벗었다. 목에서 코까지는 걸리는 곳이 없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묶으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한 곳은 몸통. 겨드랑이 밑으로 가슴에 묶어보았다. 하지만 몸줄은 줄이 돼지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돼지는 네 다리가 땅에 붙어 있으면 모든 힘을 쓸 수 있었다. 앞으로 밀고 가면 줄이 쑥 빠졌다. 몇번을 묶고 실패하길 여러번. 결국 다리에서 성공한다. 발가락 위가 살짝 오목했다. 사람으로 치면 손목 같은 곳을 묶었다. 뒷발은 빠지지만, 앞발은 빠지지 않는다. 앞으로는 밀고 나가면서 세게 당길 수 있고 뒷걸음치는 힘은 약해서 앞발의 매듭은 빠졌다. 발 하나만 묶어둔다. 


세마리 중 누굴 먼저 잡아야 할까. 고민이 됐다. 내게 불안감을 주는 덩치 큰 대장 돼지가 1순위였다. 돼지우리 안에 들어가면 내 뒤를 따라오던 대장. 거친 숨소리와 입에 물린 거품. 덩치 큰 동물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빳빳하게 세운 등털은 내 등털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젠 나를 밥 주는 사람으로 인정했는지, 공격 의지는 시들했다. 하지만 여전히 뒤가 걱정이다. 다른 돼지들 귀를 물거나 밥그릇을 독차지하는 깡패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괘씸한 감정으로만 선택할 수는 없었다.  


현실의 문제가 있었다. 암퇘지가 새끼를 낳으면 곤란했다. 돼지들이 짝짓기를 했다. 새끼를 받아 돼지 키우기를 계속 이어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한번에 열마리씩 새끼를 낳는 속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법정 시설도 갖춰야 하고, 같은 형제끼리의 교배는 열성 유전을 낳는다. 암퇘지는 덩치가 작아 다른 돼지들에게 항상 치였다. 맛있는 밥도 많이 못 먹었다. 다른 형제들이 먹고 남은 밥을 먹어야 했다. 워터파크도 다른 돼지들 후에 즐겨야 했다. 


암퇘지가 제일 작다고는 했지만 나보다도 컸다. 돼지를 잡기로 한 날로부터 몇주 전, 사실은 돼지를 데려오던 날부터 돼지 잡는 일은 큰 부담이었다. 한숨이 푹푹 쌓여 머릿속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몇번이고 돼지 잡는 날을 상상했다. 


고기를 먹어야 한다면 직접 키운 동물을 직접 잡는 것이 최소한의 윤리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키워줬으니 먹혀라’라는 관계는 정의로운가. 유전자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식용 동물은 지구상에 가장 번성한 종으로 측정된다. 경제 동물이 늘어나는 만큼, 야생동물 수는 극적으로 줄었다. 지상의 동물 총량으로 보면 인간과 가축이 97%를 차지한다. 다르게 보면 돼지의 유전자가 인류를 이용하여 번성했다. 야생동물은 3%로 쪼그라들었다. 심지어 8억 인류가 굶어도 선진국 식생활을 위한 동물들은 살찐다. 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으로만 이 관계를 문제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암퇘지에게 마지막 식사로 요구르트를 준다. 하얀 요구르트는 돼지들이 가장 좋아하는 밥이다. 암퇘지의 마지막 식사를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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