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호동호 Oct 29. 2020

17. 탕박과 발골

돼지를 부탁해

암퇘지는 눈 주변으로 동그라미 눈썹이 났다.



다른 이들이 속속 도착한다. 함께 돼지를 거꾸로 매단다. 돼지의 목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다른 생각은 접고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줄을 트랙터에 걸고 들어 올린다.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한 후, 목에 있는 경동맥을 찌른다. 주룩. 피가 나온다. 피를 빼내는 방혈防血. 피가 남아 있으면 고기가 더 빨리 썩는다. 피가 빠지는 동안 한숨을 돌린다. 수돗가로 와서 진땀을 닦는다. 일은 이제 시작인데 벌써 몇시간은 지난 것 같다. 몇주 전부터 미리 정해둔 순서를 점검한다. 누가 무엇을 맡을지 미리 정해두었다. 해체와 정육, 양념과 저장의 과정을 다시 확인했다. 물 한모금 마시고 돼지에게 돌아가는 길.


“끄악!” 갑자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저쪽에서 피범벅인 개가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지옥의 개 켈베로스가 무고한 돼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온 것은 아니고, 철인 W의 개 ‘우구牛口’였다. 우구는 사람 좋은 철인 W의 집에 얹혀 사는 떠돌이 개였다.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우구가 돼지 피를 ‘할쭉할쭉' 먹은 것이다. 떠돌이 생활 탓인지 한쪽 눈을 잃고, 다른 쪽 눈도 허옜으며 뒷다리를 절뚝였다. 하얀 털은 새빨간 피를 더 돋보이게 했다. 사람을 잘 따르는 우구가 피를 먹는 와중에도 반가운 우리에게 뛰어온 것이다. 반가워해주니 고맙긴 한데, 피범벅으로 절룩이며 뛰어오자 좀비가 따로 없었다. 아오 깜짝아. 지옥에 온 줄 알았네.


피를 뺀 후, 탕박湯剝을 한다. 뜨거운 물을 부어 돼지털을 제거하는 것이다. 100도의 끓는 물은 돼지의 진피까지 익히기 때문에 이보다 낮은 온도의 물을 쓴다. 70도 정도. 뜨거운 물이 닿으면 살이 살짝 뜨는 게 보인다. 허옇게 뜬 표피를 호미로 살살 긁는다. 얇은 표피가 털과 함께 벗겨지며 분홍빛 살이 나온다. 흑돼지도 속살은 똑같이 분홍빛이다. 칼날은 돼지 살에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에 무딘 날을 쓴다. 돼지껍질을 먹지 않을 예정이라 털을 깔끔하게 제거할 필요는 없었다. 살코기만 소금에 절여 숙성하려 했다. 껍질과 비계는 오랜 보존을 방해한다. 털을 거칠게 정리하고 가스 토치의 불로 살짝 꼬슬려 남아 있는 털을 제거한다.


머리를 떼어낸 다음 내장을 뺀다. 목에서부터 항문까지, 배를 가른다. 명치 아래부터 복부는 내장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에 칼질을 조심히 한다. 손가락 한마디 깊이까지는 비계가 나온다. 그리고 내장을 감싼 얇고 하얀 막이 나온다. 내장이 터지지 않게 신중하게 막을 자른다. 오장과 육부가 보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람 속과 똑같다. 식도에서 항문까지, 내장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내부 열을 따라 돼지의 살과 피 냄새가 훅 퍼진다. 맡는 순간 누린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냄새. 손에 배고, 코에 밴 냄새. 끝내 뇌신경에 배어버린 냄새. 평생 누린내를 맡아본 적이 없는데, 어떤 저주처럼 나는 이제 이 냄새를 기억하게 되었다.


내장을 빼낸 후, 목에서 엉덩이 방향으로 몸통을 나눈다. 등뼈를 따라 좌우로. 도축장에서는 대형 톱으로 순식간에 자르지만 우리가 가진 도구는 칼 한자루뿐이다. 관절이 많고 촘촘한 등뼈를 분리하는 작업은 난이도가 높다. 뼈 틈을 찾지 못하는 칼이 뼈마디마다 걸리고 부딪쳤다. 모두가 등 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땀이 뻘뻘 맺혔다. 해는 점점 떠오르고 날이 더워졌다. 시원할 때 끝내야 한다는 부담에 힘이 들어간다. 힘을 빼야 일이 쉬운데, 다짐은 쉬워도 실행은 어렵다. 뼈에 걸릴 땐 또 힘이 들어간다. 뼈를 긁어 칼이 무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돼지를 반으로 갈라 좌우로 만든 상태를 이분도체라고 한다. 이분도체 좌우 각각을 삼등분한 것을 육분도체라고 한다. 이분도체로 만들면 이때부터는 한시름 놓인다. 제빵 D와 좌우 한쪽씩 나눠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제빵 D는 서울에서 귀농한 요리사. 요리사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식칼을 품고 다닌다. 경력을 살려 마을 빵집에서 지역 밀로 빵을 만들고 있다. 우리 밀 특성에 맞는 빵을 만들기 위해 그의 연구는 오늘도 계속된다. 덕분에 남는 빵, 실패한 빵은 돼지 밥이 되었다. 제빵 D는 고기를 사랑한다. 돼지 정육을 배우기 위해 같이 워크샵도 다녀왔다. 고기를 대하는 그의 자세는 진지하다. 그만큼 좋아하는 것은 술. 술 없는 약속이나, 술 마신 다음 날의 약속은 항상 늦는 편이다. 오늘 술이 없어서일까.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칼 갈기는 제빵 D 담당이다. 우리 중 칼날을 세울 수 있는 이는 제빵 D밖에 없다. 때문에 발골용 칼도, 숯돌도 모두 그에게 있었다. 칼을 갈아오는 것이 그의 과제였다. 시간이 지나도 제빵 D가 오지 않는다. 연락도 닿지 않는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금언이 생각났다. 아쉬운 대로 아무 칼로 작업을 시작한다. 식칼은 발골용이 될 수 없다. 길고 얇은 칼이어야 한다. 급하게 칼을 갈아보지만, 칼은 세워지지 않는다. “이게 아니야!” 아침 해는 떠오르고 마음이 닳았다. 참다못해 그의 집으로 파발마를 띄운다. 잠시 후, 칼만 황망히 실려 온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제빵 D는 조금 더 지나고 도착한다.


따뜻했던 돼지의 몸은 숨이 빠져나가며 차차 식는다.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도 나뉘고, 다른 사람들의 역할도 시작됐다. 몇 고비가 더 남은 건지 모르겠으나, 또 한번의 고비를 넘겼다.


        

이전 19화 16. 망치를 들고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