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부탁해
머리는 이미 깨어 있었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뜬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누운 상태 그대로 몸을 점검해본다. 아픈 곳은 없다. 핸드폰을 연다. 새벽 6시.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았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늘이 연기되었길 잠깐 소망해본다. 애석하게도 너무 순조로운 날이다. 돼지를 잡아야 한다. 나를 잡는 심정이다.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돼지우리에 간다. 잠이 덜 깬 새벽은 신비롭다.
이슬은 고요하다. 갈피를 정하지 못한 이슬은 안개가 되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풀을 헤치는 장화가 젖는다. 다른 이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벽에 서서 돼지들을 바라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온 건 처음이다. 돼지들도 놀란 것 같다. 어리둥절해서 밥을 달라고 보채지 않는다. 암퇘지를 묶어둔 밧줄은 다행히 풀리지 않았다. 돼지는 얌전히 밧줄을 감고 있다. 하얀 안개 속 검은 돼지들은 신선 같다. 신선들은 더위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준비를 시작한다. 벽을 넘어 우리로 들어간다. 우선 다른 두마리를 분리시킨다. 밥을 미끼로 철장으로 끌고 들어간다. 암퇘지도 따라 들어가려고 한다. 얼른 문을 닫는다. 철컹. 들어간 돼지도 밖에 있는 돼지도 어리둥절이다. 문을 사이에 두고 무슨 일인지 대화를 나눈다. “꿀꿀.” 별게 없다는 걸 깨달은 두 돼지는 곧 밥에 집중하고, 별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암퇘지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미리 준비해둔 중망치를 들어본다. 무겁고 차갑다. 돼지 앞에 선다. 피가 빠르게 돌지만 머리에는 피가 부족하다. 오늘 우린 이별이다. 데려오던 날부터 부담되었던 일을 곧 시작한다. 주변 누구도 내가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데려왔고, 내가 시작한 일이다. 마무리할 책임이 내게 있다. 그렇지만 꼭 내 손을 통해 마무리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도 있고, 도축장에 데려갈 수도 있다.
‘도축장으로 데려가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전살법이라고 해서, 전기를 통해 돼지를 기절시킨다. 30분이면 한마리가 해체된다. 도축장은 대량의 동물을 처리할 수 있다. 군대 전역을 앞둔 무렵, 군제대자에게 해외 취업처를 알선하는 안내가 왔다. 호주는 단골 국가였고, 몇년 일하면 영주권도 가질 수 있다 했다. 일 잘하는 한국 군인을 좋아한다는 희망 섞인 소문도 돌았다. 빈번한 업종은 ‘식육 가공'. 경력 무관임에도 꽤 높은 임금을 받았다. 어쩌면 호주에 갔을 수도 있다.
캡틴 H가 왔다. 돼지를 데려오던 날과 같은 방진복을 입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준다. 돼지가 방심하는 순간 내리쳐야 한다. 한번에 기절시키지 못하면 낭패다. 돼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 망치를 치켜든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심호흡을 한다. 들숨은 길고, 날숨은 짧게. 목표는 이마 위. 정수리를 정확하게 내려칠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 돼지 스스로 머리를 대줄 리 없다. 아직, 아니, 아직이다. 움직임 하나하나 미세하게 따라간다. 지금이다. 숨을 멈춘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리쳐.' 세글자만 머릿속을 떠돈다. 돼지는 그사이 자리를 옮긴다. 자세를 가다듬어본다. 숨을 내뱉고 망치를 허공에 휘둘러본다. 다시 때를 기다린다. 그대로 천천히 나는 굳는다. 눈은 끔뻑이지만 신경이 끊어진 듯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애초 내려칠 마음이 없었다. 함께한 시간이 떠올랐다거나, 추억 같은 감정이 아니다. 저항의 정체는 살아 있는 생명을 망치로 내려친다는 것, 생명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거북함이다. 내려칠 수가 없다. 돼지도 생각이 있고, 피가 흐르고, 숨을 쉰다는 그 동질감이 이제는 거부감이 되어 나를 압도한다. 그대로 나는 소금기둥이 된다. 몸은 통제력을 잃고, 숨 쉬는 법을 잊는다.
돼지를 잡는 부담에 뒤척이던 밤이면, 동네 아저씨에게 부탁드릴까 싶기도 했다. 마을행사에서 돼지를 잡던 아저씨의 모습에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 아저씨는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였다. 막막한 때에 한줄기 탈출 안내등이었다. 결전의 날이 다가옴에 따라 나는 그 불빛 아래서 망설였다. 거의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돼지 앞으로 밀어놓은 것은 어떤 예의였다. 돼지를 취할 사람으로서 직접 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돼지를 마주할수록 그 마음은 커졌다. 잡아먹는 게 배신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리는 게 배신 같았다. 남이 죽인다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책임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목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남의 살을 먹는 일, 생명을 얻는 일은 쉽지 않다. 그동안 나는 너무 쉽게 살았다.
“이리 줘. 내가 할게.” 보고 있던 캡틴 H가 말했다. 가슴이 탁하고, 긴 숨을 토한다. 결국 나는 해내지 못했다. 캡틴 H가 돼지 옆에 선다. 돼지는 갈라진 비명을 지른다. 소리의 파동은 몸과 피부, 뇌 전체를 울린다. 줄을 잡은 몸에는 힘이 들어간다. 혼이 나가고, 팔 근육은 오그라든다. 진땀이 나고, 긴장한 팔이 뻣뻣해진다. 다리를 묶은 줄을 더 굳게 잡는다. 빨리 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비명은 점점 작고 약해진다. 돼지 코에서 피가 나왔다. 캡틴 H도, 돼지도, 나도 숨을 고른다.
나중에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호주에서도 도축장 일은 기피 직업이었다. 이주민과 사회적으로 하층의 사람들의 일자리였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보이지 않는 일이다. 분업화는 최소한의 인력으로 높은 효율을 이룩했다. 다르게 말하면, 생명을 죽이는 일의 고속화였다. 시간의 압박과 연속되는 살생, 위험한 노동 환경은 노동자를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도 또다른 짐승이 되었다. 살려는 동물과 죽이려는 동물의 모습이 도축장 내부의 모습이었다.
도축에 ‘윤리’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지 묻고 싶었다. 윤리적으로 죽인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죽는 마당에 예의가 무슨 소용인가. ‘동물복지’도 결국 사람 중심의 생색은 아닐까,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자기위안 말이다. 산업식이 아닌 방법으로, 망치로 천천히 돼지를 잡는다고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게 아니었다. 성스럽다거나 천사들이 내려와 죄를 사해 주지도 않는다. 분명한건, 책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측정할 수는 없지만, 생명을 거두는 데에는 어떤 책임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도축장에 맡겨둔 우리의 책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책임은 외면하면 그만인 책임일까?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쪼개지고 흩어진 우리의 책임이 어디로 가는 건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