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호동호 Oct 31. 2020

19. 널 먹어도 되겠니

돼지를 부탁해

왜 하필 돼지를 선택했을까. 우선 토끼나, 염소같이 익숙하지 않은 동물을 기르는 것은 대안 연구 취지에 맞지 않았다. 소, 닭, 돼지 같은 주요 가축 중에 하나여야 했다. 소를 키워야 하나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이미 소를 기르고 있었다. 소 축사가 있으니, 소에 대한 실험이 제일 쉽다고 할 수 있었다. 곡물 없이 풀만 먹여 소를 기르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소는 자라는 기간이 최소 2년이었다. 게다가 500-600kg나 되는 큰 동물을 잡아 먹는 건 정말 큰일이었다. 고기로 먹는 것이 소의 유일한 쓰임이라면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다. 


크기로 보았을 때, 닭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부담도 적어, 언제든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캡틴H는 바로 부화기를 구매했다) 하지만 우리 입맛부터 프랜차이즈 치킨에 길들여져 있었다. 치킨은 염지라는 기술이 필요했다. 주삿바늘을 꽂아 염지액을 넣는다. 후라이드치킨과 삼계탕은 다른 차원의 음식이 되었다. 크기가 작다는 건 다른 문제도 있었다. 작은 만큼 많이 길러야 하고, 그것은 자주 잡아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잦은 도축은 부담되었다.


돼지는 빨리 크면서도, 소와 닭의 중간 크기. 게다가 무던한 성장을 하는 동물이었다. 최근까지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던 이유가 있었다. 같은 잡식동물인 닭보다 거친 먹이를 더 다양하게 먹었다. 돼지는 치킨과 다르게 고기 자체로 맛을 낼 수 있었다. 우리가 많이 먹는 가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사람과 가장 비슷한 동물이었다. 때문에 도덕적 질문을 마주해야 했다. 


돼지를 잡았지만, 여전히 두 마리 돼지가 남아있었다. 동료 돼지의 빈자리를 다른 돼지는 알고 있을까. 오늘도 돼지 밥을 주고 똥을 치우러 왔다. 평소와 다름없는데 내가 죄책감을 느낀 것뿐일까. 밥 먹으러 달려오지 않는 것은 그냥 더위 때문일까. 원래 주춤거렸던가. 경계하는 건가. 헷갈린다. 사무적인 관계랄까, 도축 다음 날 돼지우리에는 서로의 행동만 있을 뿐, 교감은 없다. 


돼지는 제법 똑똑했다. 사람 오는 소리가 들리면 밥이 생긴다든지, 수영장에 신선한 물을 넣어준다든지, 간식을 준다든지, 어떤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알았다. 벽 너머로 슬쩍 쳐다보면, 이미 꼬리를 흔들며 서 있곤 했다. 돼지는 자랄수록 자아가 생긴다고 한다. 개 수준의 지능과 교감 능력을 갖고 있다. ‘개'랑 비슷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도시에서 자란 내게 개는 ‘가족’ 선상에 있는 동물이었다.


“‘(돼지를) 집에 있는 아기처럼’ 다루라는 말을 자주 들었어.” 대기업의 돼지 축사에서 최근까지 일했던 친구가 말했다. “아기라니, 난 헷갈렸어. 그 상사가 돼지한테 하는 행동은 아기에게 하는 거랑은 달랐거든. 돼지는 절차대로 생산됐어. 규격에 맞지 않는 돼지는 불량품으로 취급됐지. 불량품은 폐기되기 마련이야. 나도 그 안에 있을 땐 그게 잔인하다고 생각은 안 했어. ‘아기처럼'이라는 말도, 그만큼 돼지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아끼라는 거였지.” 


같은 시기 지역 시민단체에서도 돼지를 키웠다. 돼지를 많이 키우는 지역이었고, 가장 큰 현안은 축산으로 인한 문제였다. ‘뜰에서 돼지 기르기' 프로젝트는 돼지와 사람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쉽게도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터지면서 프로젝트는 급하게 종료되었다. 종료를 앞두며 돼지를 ‘진짜' 축사로 보낼지, 도축할지의 기로에 섰다.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들은 ‘진짜' 축사는 돼지가 ‘진짜' 산다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먹음으로써 돼지를 기억하기로 했다. 식사로 조촐한 추모식을 열었다. 남은 뼈는 돼지가 살던 터에 묻었다. 


그때당시 사람들은 상품이 아닌 살아있는 돼지를 처음 보았다. 잠깐이었지만, 가축이 행복해야 사람도 행복하다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나도 키운 돼지를 잡아먹는다는 것에 불편한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돼지’를 보다보니, 일부 채식 담론에 의문이 생겼다. 가축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은 육식 자체를 죄악시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갖게 했다. 죄책감은 대체로 반감을 불렀고, 현실을 더 외면하게 만들기도 했다. 죄의식은 나쁜 상황을 존치하는 효능이 있었다. 축사에 사는 가축의 환경, 축사 주변을 사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논의는 육식주의자들의 포교활동처럼 여겨졌다. 이분법은 중간 없는 평행선을 만들었다. 


세마리 돼지가 떠난 자리. 봄이 오면서 토마토 싹이 난다. 돼지 똥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돼지는 토마토의 시간을 보냈다. 토마토를 먹고 또 먹었다. 토마토의 시간은 갔고, 이제 돼지의 시간이 되었다. 토마토는 돼지 똥의 양분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힌다. 생명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돼지를 키우고 또 잡으면서 먹는 것의 책임을 배울 수 있었다. 


인간은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지 않는 부산물을 통해 가축을 길러왔다. 생태계가 감당하는 만큼 가축을 길렀다.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잉여를 만드는 지금. 필요보다는 탐욕이 아닐까.

이전 21화 18. 오리도 부탁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