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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동호 Oct 29. 2020

14. 대장을 정하자

돼지를 부탁해

돼지우리에 쓰인 공룡알(곤포)은 정말 튼튼했다. 크고 높았기 때문에 밖이 보이지 않았다. 일종의 장벽이었고, 전기 울타리까지 더해져 철옹성이 되었다. 돼지들은 전기에 한두번 쏘이고 나서는 전깃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전기를 꺼두어도 될 정도였다. 운동장 풀은 전부 사라졌지만, 전깃줄 밑의 풀은 생생했다. 돼지들이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을 그냥 내버려두고 싶지만 전기 울타리가 언제고 필요할 수 있으니 정리해주어야 했다. 전깃줄에 풀이 닿으면 분배의 법칙(1/n)에 따라 전기가 약해졌다. 풀이 전기를 흡수했고, 돼지우리에는 아직 전기가 필요했다. 


돼지우리에 들어가 전기 울타리에 붙은 풀을 베던 날이다. 낫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작업에 집중한다. 불현듯 뒤통수가 서늘하다. 이상한 느낌을 따라 쳐다본 곳에는 대장 돼지가 서 있다. 자리를 비켜준다. 성큼성큼 나를 따라온다. 응? 다시 자리를 비켜주지만 그대로 따라온다. 눈에 적개심이 차 있는 게 백허그는 아닐 것이고. 수퇘지는 거친 숨을 뱉고, 입에는 거품이 물려 있다. 앗, 혹시 광견병? (떠돌이 동물인 개과 동물이 흔한 숙주이지만, 거의 모든 포유류가 걸린다. 2005년 이후 국내에서 발병한 사례는 없다.) 습격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하필 전기 울타리도 꺼두었을 때... 아니 지금 켜져 있으면 내가 손해인가. UFC 격투기 경기가 시작된 기분이다. 일단 급히, 우리 밖으로 (도망) 가서 상황을 파악한다. 눈이 빨갛진 않은 걸 보면 광견병은 아니다. 그래, 정말 미친 거라면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겠지. 틈을 노리는 것 같다. 거리를 좁히고 고개를 낮춰 사냥감을 보듯, 계속 쳐다봤다. 목털도 곤두서 있다. 돼지들은 싸울 때 목 뒤의 털을 세우곤 했다. 분명 적개심이다. 잡아먹을 거라는 계획을 알게 된 걸까.


대안축산연구회 회원들에게 문의했다. 어려서부터 많은 동물들을 경험하고, 집 한켠에서 돼지를 키우던 시절을 보았던 이들이다. 지금도 동물을 키우니 이런 경우를 알고 있지 않을까. 수소의 경우 가끔 사람을 구석으로 몰아서 들이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숫염소에 받혀서 병원에 입원하신 어르신도 있다. 수탉도 어린아이를 얕잡아보는 경우가 있다. 나를 쫓아오는 돼지도 수퇘지. 어디나 수컷이 문제다. 하지만 연구회원들이라고 똑부러진 답을 내놓진 못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대장 수퇘지부터 잡아먹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순서를 정했다지만, 잡는 날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동안 수퇘지를 상대하는 건 나였다. 이웃은 멀고 깡패는 가까웠다. 대장 돼지는 청소 중에도, 밥그릇을 정리할 때도 어느새 뒤에서 씩씩거리고 있다. 돼지들 사이에서 서열정리가 된 뒤였다. 이곳을 제패한 후, 그다음은 … 나인가?


어느날은 기선을 제압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언제까지 겁에 질려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막대기를 들고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합기도부 차장 출신의 맛을 보여주마. 역시 수퇘지가 다가왔다. 목표는 코다. 막대기를 힘껏 내리쳤다. “탁!" 막대가 땅을 때렸다. 돼지가 재빠르게 피했다. 어쭈? 다시 한번 막대를 휘두른다. 돼지는 날랬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옆으로 길게 휘둘러보아도 돼지는 막대 거리만큼 슬쩍 피했다.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우선 밖으로 나왔다. 숨이 조금 가빴다. 짧고 휜 막대가 둔하고 사거리도 짧았을 뿐이야. 


실갱이는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막대가 효과를 보였다. 막대를 들면 대장도 호락호락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대장은 여전히 등 뒤에 있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울타리 곳곳에 막대를 두었다. 어디서든 집어 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차, 막대를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날 말이다. 막대기는 저기 저쪽, 그러니까 돼지 뒤에 있었다. 모든 걸 계산한 건가. 


마주 선 채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다. 여기까지 와서 뒤돌아설 순 없다. TV방송 <동물의 왕국> 애청자로써 동물의 세계에서 뒷모습은 항복을 뜻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이것은 나 혼자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인류와 돼지의 대결이다.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옛날의 껌딱지가 아니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대로 돼지를 향해 돌격. 무릎을 높게 들며, 소리를 질렀다. “캬악!” 반응이 있다. 돼지가 물러섰다. 고무된 나는 그대로 박수를 쳐댔다. 머리 위로! “캬악! 캬악!" 긴 시간이었다. 막대기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니 어느 샤머니즘 의식에 도달했다. 막대를 불끈 들고 돼지를 봤다. 그 뒤로 대장은 내 앞에서 게거품을 물지 않았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등이 서늘할 땐, 여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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