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부탁해
매일 한두시간씩, 돼지 주변에 머무른다. 집을 손보고, 밥을 줘야 한다. 밖에 나와도 돼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돼지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갔다. 돼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뽕나무, 환삼덩굴, 찔레나무 가지 같은 잡목과 잡초들, 밭을 정리하며 나온 부산물은 모두 돼지에게 주었다. 이것엔 어떻게 반응할까, 호기심을 자극해보고 싶다. 돼지들은 달려와 냄새 맡고 씹어본다. 밭일을 하다가도 쉴 때는 돼지 옆으로 가서 쉰다. 돼지들은 땅을 파고 목욕을 하고 낮잠을 자며 하루를 보냈다. 진흙에 드러누워 몸을 비비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 어딘가의 응어리도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면 집으로 갔다.
송아지 눈은 정말 크다. 뽀송뽀송한 털이 눈을 더 돋보이게 한다. 돼지도 그 못지않게 맑은 눈을 가졌다. 매일 돼지를 보지만, 돼지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까맣고 촉촉한 눈! 사람 눈과 닮은 눈이 나를 또렷이 쳐다보고 있었다. 돼지눈은 흰자위가 적다. 흰자위가 보이는 포유류는 인간뿐이란다. 인간은 다른 이가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진화했다고. 돼지는 검은자위밖에 없어서인지 고대 그림 양식처럼 어느 곳에 서서도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 든다. 그 눈과 마주치면 거울 뉴런들이 작동한다. 내 거울 신경은 돼지를 의인화한다. 돼지는 자아를 가진 동물이 되고, 내게 말을 거는 상대가 된다. 말이 통하고 이해 가능한 특별한 존재가 된다. 우리 이야기의 결말은 도축이다. 우리(?)는 아직 순조롭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너를 먹을 예정이다. 살인 대상과 친해지면 안 된다는 킬러의 수칙이랄까, 나는 울타리 너머에서 돼지 눈을 몰래 훔쳐보곤 한다.
돼지를 잡는 날, 내 마음은 어떨까. 측은함이나 가책을 느낄까. 주저하게 될까. 혹시 눈물이 날까. 못 먹는 건 아닐까.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더라도 그때부턴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다. 나는 돼지를 따로 부르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았다. 나는 사육자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세 마리 돼지의 어린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였다면, 정을 주었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려동물과 가축의 경계선을 걸었을 것 같다.
의인화는 약한 마음의 발현일까, 감수성의 다른 이름일까. 돼지를 보고 있으면 눈치 빠른 돼지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 흑돼지의 모든 부위가 거칠게 생겼지만 하필 눈은 착하게 생겼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오늘도 나는 돼지 옆에서 홀로 북 치고 장구를 쳤다. 우린 거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먹이를 주고, 먹이를 먹는다. 보살펴주고, 잡아먹는다. 인간과 가축이 만년 넘게 이어온 관계. 사랑하는 것과 먹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집으로 간다. 돼지는 동물의 왕국에서 제일 영리한 동물에 속한다. 지식과 학습능력 판단에 적용하는 기준이 너무 많은 탓에 순위를 매기는 건 불가능한 일로 보이지만, 과학자들이 그런 일을 시도하면 돼지는 10위 안에 드는 동물이다. 돼지를 능가하는 유일한 네발짐승은 코끼리 딱 한 종뿐이다. 이건 당연히 돼지가 - 적어도 거기에 사용된 기준을 바탕으로 보면 - 인간의 제일 친한 친구인 개보다 영리하다는 뜻이다.
<돼지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 중
노예생활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돼지와 함께하는 동안, 매일 일정한 시간을 매여야 했다. 내가 돼지를 키우는 건지, 돼지가 나를 키우는 건지 헷갈리곤 했다. 밥 얻어오기, 똥 치우기, 물 떠오기. 요구사항은 간단하지만, 꾸준히 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난감 좀 가져오너라’, ‘오늘은 밥이 조금 늦은 것 같구나' 같은 말을 하는 듯했다. 자급이라는 말 참 멋지지. 사료 없이 길러보겠다고, 먹잇감을 구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돼지들을 두고 어디 멀리 가지도 못했다.
몸종처럼 살면서도 나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돼지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던 덕분이다. 돼지의 기쁨은 말하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발산되는 돼지의 생명력을 보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도끼자루가 썩는 줄 모르고 쳐다봤다. 좌고우면하고 우왕좌왕하는 나를 돼지들은 늘 격려해주었다. “꿀꿀(오냐오냐)”
만약 고기 섭취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면? 필수식품이 아니라 그저 기호식품이라면?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비평가인 제러미 리프킨은 “육식은 인류가 극복해야 할 문화”라고 했다. 채식으로도 충분히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제는 정신 수양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운동선수들도 더 좋은 성적을 위해 채식을 선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고기를 먹어야 한다면, 도축에는 어떤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돼지를 잡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시간은 빨랐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돼지를 잡을 날이 다가왔다. 여름이 되기 전에 첫번째 돼지를 잡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