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내 딸 어디 있어? 당장 내 딸 내놔!
당신이 뭔데 자식을 못 만나게 하는 거야?
센터 문이 벌컥 열렸고,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신발을 신고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왔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나가보니 예상대로 영아 아빠였다. ‘올 것이 왔다.’ 언젠가 마주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찾아오니 심장이 덜컥했다. 영아만 생각하며 두려움을 밀어 넣었다.
따뜻한 봄날과 비슷한 영아는 또래에 성숙한 말투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인상적이었다. 나무랄 데 없이 자기 관리도 잘했고, 리더십도 있어서 친구들과 동생들을 잘 이끌었다. 한 마디로 모범생이었다. 조금만 길을 내어주면 혼자서도 잘하는 영아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아빠였다.
아이 키를 크게 해야 한다며 매일 아침 1리터의 우유를 먹였다. 영아 엄마는 말릴 수 없었고, 영아는 반항할 힘이 없었다. 어느 날 센터에 와서 배가 아프다며 움켜쥐고 있어서 뭘 잘못 먹었는지 물었다. 그때 영아가 털어놓길, “아침에 아빠가 우유를 먹으라고 해서 억지로 급하게 먹었더니 탈이 났나 봐요. 학교에서부터 배가 아팠어요.” 아빠의 그릇된 생각이 아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다였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영아 상태를 전달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남편과 이야기해 보겠다는 게 전부였다.
아빠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은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 영아와 나란히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데, 아이가 허벅지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아픔을 참고 있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이상해서 반바지를 살짝 올려봤다. 시퍼런 멍이 보였다. 정말 교묘하게 바지선 위로 멍이 있어서 바지를 들추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아빠한테 말대꾸했다고 맞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다가 감정이 격해진 영아는 울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본 모든 게 명백한 학대였다.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어서 엄마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엄마는 아빠의 훈육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뉘앙스를 비췄다. 훈육인데 멍이 들 때까지 때리는 건 잘못된 일 아니겠냐고 묻자, 자신도 남편을 말렸으나 속수무책이라고 했다. 본인 역시 남편에게 저항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걸 보면, 엄마도 피해자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얼마나 자주 이런 일이 있는지, 가정 폭력은 없는지 이것저것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뭔가 숨기는 듯 멈칫했다. 답을 계속 피하는 모습이라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상황을 명백하게 주시하고 있으며,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즉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한 후 엄마를 돌려보냈다. 다행히 그날 이후 아이에게서 어떤 특이 사항이 발견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영아는 중학생이 됐고,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던 어느 날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이들 모두 귀가시키고 업무 마무리를 하고 있던 저녁 시간, 밖에서 영아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영아니?” 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어보니 여행용 가방과 커다란 짐을 싸 들고 온 영아와 엄마가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모녀를 센터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혹시 밖에서 안이 보일까 봐 교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생각보다 영아 엄마는 차분했다. 그동안 영아 아빠의 폭력은 여전했고, 견디다 못해 간단한 짐만 챙겨서 집을 나온 상황이었다. 몰래 나와서 현재 무일푼이고, 당장 갈 곳을 찾아 수소문 중이라고 했다. 겨우 친척 집을 들어갈 수 있게 됐는데, 짐을 갖고 들어갈 수 없어서 센터에 맡겨도 되겠냐는 엄마의 부탁이었다. 얼마든지 가능하며, 도울 수 있는 일은 뭐든 하겠다고 했다. 영아 엄마는 아이가 센터를 다니기 때문에 남편이 분명 찾아올 게 뻔해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어머니, 그건 제가 할 역할이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추스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만 생각해요”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나도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를 일에 대해 대비해야 했다.
이후 엄마는 한동안 기관에 찾아오지 않았다. 당분간 엄마와 숙박업소에서 지내며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영아를 통해서 들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녀는 빌라를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아 엄마가 남편의 연락을 피하자, 결국 영아 아빠가 센터로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자 사회복지사 두 명이 화가 잔뜩 난 남자 한 명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신고하겠다고 소리를 지르자, 나를 한참 쏘아본 후 그대로 나가버렸다. 사실 부모가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데, 영아 엄마가 남편이 보기 싫다며 계속 연락을 피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동을 피운 이후 영아 아빠는 센터에 찾아오지 않았다. 다행히 영아 학교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영아 엄마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결정했지만, 영아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기 있겠다며 따라나서지 않았다. 엄마는 영아 고집을 꺾지 못하고, 먼저 이사를 했다. 영아가 엇나갈 아이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확신했고, 아이가 센터 다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엄마는 나에게 영아를 부탁하고 이사했다. 엄마의 부탁이 부담스러웠지만, 책임감을 갖고 아이를 돌봤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수지는 서울살이를 접고 엄마에게 갔다. 6년 동안 수지와 함께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든든한 울타리 같았다. 엄마 말은 듣지 않아도 우리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응하며 따라줬던 참 고마운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수지를 보내는 마음이 무겁고 허탈했다. 돌아보면 내가 수지를 떠나보내기 싫었던 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매해 스승의 날이 되면 연락하는 수지. 한국사능력시험 1급을 취득하기 위해 1년 반 동안 죽도록 공부했던 중학교 시절을 잊지 못하겠다는 수지는, 한국사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지금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핵가족화된 지금,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속담일지도 모르겠다. 온 마을은 어렵더라도, 의지할 만한 어른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아이의 삶은 훨씬 윤택해질 수 있다. 그 대상이 꼭 부모님이 아니어도 괜찮다. 학교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동네 친한 형, 누나가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사회복지사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수지처럼 고통스럽고 풀리지 않는 숙제 하나쯤 품고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숙제 앞에서 마음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고 내 말을 들어줄 사람 한 명만 있다면, 나쁜 기억에 매달리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