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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Oct 25. 2022

여무는 계절과 가을의 레드




가장 사랑하는 계절을 묻노라면 나는 단연코 가을이다. 가을에는 황홀하게 물든 단풍과 잘 익어 향긋한 열매들, 파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부신 계절의 빛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내게 어느 계절이 그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이유는, 가을의 어둡고 쓸쓸한 모서리들 때문이다. 마른 계절의 다소 날카롭고 선명한 그 경계는 마치 내 삶 같기도 하다. 어느 날은 웃음이 가득했다, 또 어느 날은 울고 화가 났다, 어느 날은 의욕이 하늘 높이 솟다, 또 어느 날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해지기도 하는 일상. 진폭 큰 일상과 감정의 단편들 어디에 내가 있든, 나를 끌어 안아 도닥여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가을의 모습 안에 있다. 그 품에서 이 아름다운 계절을 닮았다는 보편적이고 커다란 이유 하나로 나는 손쉽게 위로 받는다.



잔에 계절을 닮은 와인을 따라야지. 이 계절의 낭만을 곱씹어 봐야지. 어떤 와인을 따를지 고민한다.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와인, 첫 향으로 가죽냄새가 코 끝에 스치면 뒤따르는 물큰한 흙과 파프리카 냄새를 한껏 음미하고, 입을 가득 채운 라즈베리 한 웅큼이 천천히 녹아 흐를 때까지 그 맑은 단맛에 버무려진 이전의 향들을 즐긴다. 이태리 아르부조의 와인은 진한 색만큼 짙은 검은 베리와 자두의 녹진한 단맛이 들고, 다채로운 버섯과 이름 모를 향신료가 단 향을 감싸는 오묘한 부드러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택이든 집 안에서 창 밖의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더 고민 않고 와인을 집어 든다. 오프너를 뒤적거리며 찾아 마개를 딴다. 펑 소리와 함께 집 안에도 가을이 들어 찬다.



이 계절이 여물기 시작하면 우린 자꾸 밖으로 나가 계절이 벗어놓은 껍데기를 구경한다. 그 누렇고 붉은 것들에선 부슬부슬 땅 냄새가 나는데 주로 다람쥐가 찾지 못한 알밤 같은 열매냄새, 그 다람쥐 발바닥냄새, 산짐승 꼬리털냄새, 닷새 전 떨어진 낙엽 썩은 내, 그 위로 어제 떨어진 잎사귀 새침거리는 내, 금방 지나간 개미 똥 내, 지난 계절 곤충들이 남겨둔 허물냄새, 거미줄이 가을볕에 마르는 냄새 그런 것들이다. 하늘 발갛게 물들인 해가 저 누울 자리를 보기 시작하면 듣고 구경하고 만져보고 하던 것 멈추고 그 푹 익은 단풍잎 같은 하늘을 넋잃고 본다. 해가지면 그 껍데기들도 잃어버린 듯 사라지고 마음만 울긋불긋해져서 돌아오는 귀갓길에선 웃으면서도 왠지 눈물이 난다. 그제 내린 가을비가 마른 땅 아래로 여전히 졸졸졸 흐른다.

-2021년 11월



계절이 아름답다고 밖으로만 나다녔더니 맺히는 문장 하나가 없다. 메모장은 몇 주째 텅텅 비었다. 책을 읽어도 눈으로 들어간 글들은 거름종이 없는 몸 구석구석을 유유히 흐르다 이내 빠져나가 버린다. 모든 자극이 부유한다. 어디 내려앉아 머리든 가슴이든 곡괭이 질을 시작해야 하건만 온 몸에 들뜨지 않은 곳이 없어 무엇도 내 것이 되지 못한다. 가까스로 부여잡은 문장들은 다음날 아침 버려져도 아깝지 않다. 어떤 풍요와 행복은 어느 불행 또는 결핍과 저울의 양 극에 있다. 가을은 때때로 두렵고 공허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을을 향한 지독한 사랑 같다.

-2018년 9월, 감탄과 탄식 사이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난 가을의 기록들을 들춰본다. 과거에도 오늘에도 나는  계절을 몹시 사랑하는구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은 웃으면서도 울게 되는 몹시 요상한 . 오늘의 와인만큼은 왜인지 어떤   없이 그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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