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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목 May 31. 2023

오늘, 퇴사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직서를 작성해본 사회 초년생의 소감

Netflix '더 글로리'


 오늘 나의 첫 직장을 퇴사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사직서 상으론 오늘까지 근무지만, 마침 휴무라 사실상 어제 마지막으로 출근했다. 쉬는 날이 일정하지 않은 스케줄 근무와 당직 업무는 나를 매일 소진시켰다. 이제 나는 불규칙적인 노동에서 당분간 해방돼 규칙적인 백수가 됐다. 계획 상으론 규칙적으로 일어나 규칙적으로 독서를 하고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내가 1년 5개월 동안 몸담았던 직장은 인터넷 신문사였다. SNS를 활발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하지만, 독자들로부터 좋은 평은 좀처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나의 명함엔 '기자'라는 직함이 달려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 기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굳이 명명하자면 '글을 빠르고 많이 쓰는 사람' 정도로 정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써서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일은 몸과 마음을 급속도로 닳게 한다. 기자라는 직함을 단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욕할 권한을 쥐어 주는 일과 같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댓글은 물론이고, 회사 메일로도 날선 문장이 불쑥 날아왔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내가 쓴 기사가 누군가에겐 고통일 수 있으니 슬픈 마은은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어떤 기사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은 채 '너는 분명 왕따였을 것', '기레기 X아' 등의 혐오 발언으로만 점철된 메일을 받을 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착잡했다. 친구들한테 이 사실을 전하며 “셀럽 된 기분”이라고 해맑은 척 덧붙였지만, 모르는 이들에게 욕을 먹는 건 절대로 유쾌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메일함을 매일같이 들여다 봤다. 소속사인 척 직접 보도 자료를 작성해서 보내주는 아이돌 팬들의 메일도 있었고, 내 기사를 대학교 교양 수업 발표에 사용하겠다며 양해를 구하는 메일도 있었다. 이런 메일을 고심해서 작성했을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면 금세 가뿐해졌다.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업무량 때문에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구력과 끈기가 없는 내가 1년 넘게 버틴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들의 기사를 쓸 때 정말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꼭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 평소보다 더욱 공들여서 작성했다. 매일 아침 일과가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는 것이라는 모 연예인의 말을 듣고 혹시 내 기사를 읽었을까, 하는 기대감이 일었다. 그가 분명 내 기사를 한 번쯤은 읽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기도 했다. 내 이름과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이름을 나란히 검색하면 내가 쓴 기사가 뜨는 게 신기했다. '덕업일치'를 느끼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더욱 소중했다.


  취업을 했을 때보다 퇴사를 결정했을 때 훨씬 많은 격려와 축하를 받았다. 이런 축복을 처음 받아봐서 얼떨떨한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직처를 구하지 않고 퇴사부터 결정했기에 불안감이 심해져서 매일 밤 명상을 하고 잠에 들었다. 최대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부던히 노력했지만 MBTI 유형이 'N'이라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의 롤모델인 재재 님과 퇴사 시기가 비슷해서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혼자서 재재 님을 퇴사 메이트 삼아 위안을 얻은 거다. '첫 직장을 퇴사하는 90년대생'이라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기도 했다.


  퇴사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하면서 이것저것 생각해놨지만 얼마나 실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지금 가장 큰 목표는 이직이다. 덕업일치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보며 다행한 설렘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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