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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목 Jun 13. 2023

내가 사는 공간을 유영하기

내가 사는 동네, 서울을 사랑하는 방법


 어느덧 9개월 차 광진구 주민이 되었지만, 나는 나의 동네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재택근무를 하느라 밖에 잘 나갈 일이 없었던 것이고, 내면적인 이유는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정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쉬는 날에 내가 사는 동네에 머무는 것보다 다른 곳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가까운 성수동이나 서울숲, 아니면 조금 멀지만 왠지 모르게 안정감이 생기는 광화문과 경복궁(전생에 궁녀였을지도), 환기미술관과 청운도서관,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가 살고 있는 부암동. 쉬는 날을 쪼개 여러 군데를 돌아 다니며 삶의 활력을 얻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동네를 구석구석 살피고 있다. 맛있는 베이글집을 발견하고 나서부터다. 발견이라는 단어가 머쓱하게도, 그곳은 자취방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해있다. 나는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거다. 어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나, 개탄하며 블루베리 베이글에 베이컨쪽파크림치즈를 발라 먹었다. 부드럽고 매콤한 우리 동네의 맛.


  우리 동네에는 토핑이 풍성하게 올라간 그릭요거트 가게도 있고, 결이 바삭하게 살아있는 에그타르트 가게도 있다. 평소에 간판만 보고 지나쳤던 곳들이었는데, 이제는 근처에 볼일이 있으면 꼭 포장해온다. 그릭요거트 가게에는 내 취향에 꼭 맞는 노래가 나오고, 에그타르트 가게에는 따뜻한 손님이 광진구를 떠나기 전에 남긴 편지가 붙어있다. 모두 다정을 이루는 것들.



  광진구와 친해지는 동안에도 내가 살펴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바로 도서관이다. 나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내왔지만, 회사에 다니는 동안은 '휴일을 도서관에서 보낼 순 없지' 하는 생각으로 도서관에 가지 못했다.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은 버스를 타고 20분 넘게 가야 해서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유의 몸.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도서관에 방문해 회원 카드를 만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쾌적한 공간이어서, 글을 써야 하는데도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송지현 작가의 <동해생활>이다. 아직 '강릉 뽕'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강릉에서 이 책을 사려고 했었는데, 내가 방문했던 서점엔 아쉽게도 이 책이 없었다.


  서울에 와서 <동해생활>을 읽으니, 당장 강원도로 다시 떠나고 싶어졌다. 여행 어플을 켜고 강릉의 한 달 숙박비를 검색해본 뒤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놨다. 사랑에 지불해야 할 금액이 너무 크다.


  두 번째로 읽은 책은 이유운 시인의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다. 저번에 읽은 <사랑과 탄생>이 너무 좋아서, 첫 책인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도 꼭 읽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도서관 책장에서 발견했다. 이유운 시인의 언어로 그려진 사랑이 좋아서 문장을 내내 붙잡았다. 사랑 도대체 뭘까. 이유운 시인의 글은 항상 사랑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도서관에서 무려 책을 세 권이나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박찬욱 감독의 사진집 <너의 풍경>이다. 사진집을 '읽었다'라고 표현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너의 풍경>을 읽을 때는 통창에 비친 자양동의 풍경을 보며 거의 누워서 읽었다. 도서관에 누워서 좋아하는 감독이 찍은 사진 바라보고 있기.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소하고 아름다운 낭만. 박찬욱 감독의 시선으로 담긴 풍경을 눈에 오래오래 담았다.



  예술과 풍경을 만끽하며 책을 잠깐 덮은 채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깜빡 졸았던 것도 같다.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책을 다 읽고 일층 카페로 내려왔다. 조금 출출했기에 소금빵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이 글을 쓰고 있다. 바삭하고 짭쪼름한 소금빵과 산미 없이 고소한 아이스아메리카노.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의 일부.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한다는 건, 나를 돌보는 일의 확장인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을 면면히 들여다보고, 길에 오브제처럼 달린 간판을 주의깊게 살펴보고. 나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다정을 선물하고. 동네를 살피고 할일을 하다 보면 금방 저녁 먹을 시간이 된다. 요즘에는 백수 혹은 취준생을 '홈프로텍터'(집 지키는 사람)나 '개인연습생'(회사에 속하지 않은 사람. Mnet '프로듀스 101'에서 소속사에 속하지 않은 연습생을 개인연습생이라고 칭하는 것에서 유래됨)이라고 부른다던데, 그렇다면 나는 '광진구프로텍터'를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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