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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리원 Jun 15. 2024

심봉사 눈뜨기

잘 보고 있고, 잘 가고 있어

 등산로 입구에 가면 형형색색 등산복을 입은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등산복부터 등산화, 배낭, 모자에 이어 스틱까지 화려한 장비들을 자랑하신다.  한국인에게는  '무언가 도전하려면  일단 장비부터 갖추어야 한다'라는 의식이 깊게 스며 무언의 약속처럼 되어버린 듯하다.   



 수영도 그랬다. 수영실력이 조금씩 향상될수록 조금 더 좋은 장비에 관심이 생겼다.  수영 장비래 봐야 기껏 추진력을 높여주는 오리발 정도 아닌가 생각했더랬다. 어느 날 수경에 자꾸 습기가 차 이제 수경을 바꿀 때가 된 건가 싶어 검색을 하던 중,  노패킹 수경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노패킹 즉 피부에 밀착되는 고무패킹이 없다는 말인데 후기가 좋았다.  패킹이 없어서 수경 안에 물이 찰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것.  어차피 하나 살 때도 되었고 속는 셈 치고 구매했다.  


 새 수경을 낀 날 심봉사가 눈 뜬 심정이 이런 걸까.  물속에서의 시야가 상당히 넓어져 있었다.  그동안 고무패킹이 시야를 가린 거였구나. 저 멀리는 물론이고 옆라인의 물거품,  비스듬 대각선 라인의 발차기까지 다 보였다.  


 멀리 보이니 수영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수경을 바꾼 그 시기 마침 평영을 배우고 있었다.  발차기가 안 돼서 강사가 나만 따로 발차기 연습을 시키기도 했고,  집에서도 평영 발 동작만 집중적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며 복습하곤 했었다.

 


 수경을 바꾸고 시야가 널리 확보되자 얘기가 달라졌다.  앞사람의 발 동작을 보며 천천히 따라갔다.  발 동작이 자연스레 되자 손동작도 속도가 붙게끔 민첩해졌다. 그렇게 2주쯤 연습하자 평영 실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자세와 속도 모두 칭찬받으니 평영이 제일 재밌게 느껴졌다. 역시 나는 칭찬에 녹아내리는 인간이다. 



 내가 바꾼 것이라곤 수경이다.  시야 확보 하나로 불안감은 사라지고 자신감은 물거품처럼 거세게 따라붙었다. 역시 운동은 장비 빨이라고 거들먹거리기엔 난 이제 겨우 오리발 입문자다.  



 오리발을 처음 착용한 날, 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물속에서의 저항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리발은 물과 내 몸을 유연하게 장악했다.  나는 그저 마음을 내려놓고 물에게 나를 맡기면 되는 것이다.  


 40분 정도 지나니 발등이 압박하는 듯한 통증이 온다. 원인은 발차기에 성급한 내 습관이었다. 천천히 다리 전체를 이용해서 발차기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저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에 급급하느라 서둘러 발차기를 했던 것. 오리발이 마치 그동안의 내 습관이 나빴다고 하나하나 지적해 주는 기분이었다.

  







 현대인들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한 고민,  불투명한 미래와 보장되지 않는 노후 등 경쟁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불안한 감정에만 휘둘리며 초사 할 수는 없다.  불안감을 벗어버릴 수 있는 주체는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불안이라는 물속으로 뛰어든다.  불안에서 헤엄쳐 나오려면 용기 내어 머리부터 물 안으로 집어넣는 것에서 시작한다.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맑은 수경을 끼는 것.  물의 감각을 익히고 헤엄치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 모두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당연히 저항감이 생기고 호흡도 힘들어질 것이다.



 내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잘 보이는 수경과 추진력을 높여주는 오리발이 있다. 뭔가 불편하다면 내 습관이 밴 일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바뀐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제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보고 내가 판단한다.



'잘 보고 있고,  잘 가고 있어.'



여전히 호흡이 가쁘고,  실력이 빠르게 늘진 않지만 수영이 좋다. 나는 수영을 배우며 자연스레 불안을 다스리는 나를 더욱 좋아하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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