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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리원 Jun 01. 2024

화려한 무의식

나는 핫핑크

 수영을 몇 달 다니니 자연스레 군살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느낌만 들었다. 사실 군살을 정리하려면 수영보다 몸 구석구석 세밀한 근육운동이 더 필요다. 그럼에도 수영은 등근육만큼은 멋지게 갈라주었다.


 첫 수영복은 무늬도 없고 절대 튀지 않는 남색의 얌전한 수영복이었다.  마치 첫 출근하는 신입사원의 보수적인 슈트 같은 느낌이랄까.  이제야 나의 첫 수영복이 '저 초보예요'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겠다.  물론 이건 취향의 문제겠지만.

 


  몸 사이즈가 줄어들다 보니 수영복이 약간 헐렁해졌고,  그걸 핑계 삼아 수영복 아이쇼핑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세계야말로 신천지였다. 파면 팔수록 몰랐던 브랜드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색감이며 화려한 패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등 쪽은 전부 훅 파여 사선으로 연결된 끈이 한껏 섹시함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건 휴양지에서나 입는 거 아닌가? 근데 너무 예쁘다. '



 몇 가지를 골라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다음 수영강습에 가니 그제야 안 보이던 풍경이 보였다. 상급반 회원들은 대부분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있었던 것.  핑크, 노랑, 초록 눈부신 색깔에 무늬는 또 얼마나 화려한지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나는 옷장 한 칸은 전부 수영복이야”



 내가 수영복을 칭찬하자, 상급반 할줌마께서 하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초급반은 전부 민무늬에 튀지 않는 색깔을 입고 있다.  착용한 수영복에서 실력과 자신감이 동시에 표출되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지금 수영복도 헐렁하겠다, 곧장 버건디색상의 수영복을 픽했다.  사면서도 이거 너무 튀는 거 아닐까, 색상이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나도 안 야해~”


 예의 그 할줌마가 나의 새 수영복을 체크해 주셨다. 입고 보니 전혀 튀는 느낌이 없어 살짝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저 핫핑크 저 파인애플 무늬도 괜찮을 뻔했어. 그 화려한 수영복들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화려함이다.





 

 인간의 의식은 빙산과 같다고 한다.  

즉 빙산의 일각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의식이라면,  물아래 감추어진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무의식이라는 얘기다. 나의 의식은 남색 노멀한 수영복인데,  나의 무의식은 핫핑크의 휘황찬란함을 뽐내는 수영복이라는 것.  내가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는 기분이랄까.  수영복으로 만족할게 아니라, 실력이 나날이 화려해져야 할 텐데 말이다.  



 카를 융은 '자신의 인생은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라고 했다. 모든 작가나 예술가들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무의식의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내가 열망하는 욕구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삶 아닐까.

 수영복에 빗대어 말했지만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에 접근하기 위해 아침마다 꿈을 기록하거나, 눈뜨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지는 꽤 되었다. (그 내용을 쓸 순 없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갈급하여 관련 책들을 탐독하고 있다. 



 버건디가 헐렁해지면 핫핑크를 결제할 생각이다. 어쩌면 물속의 거대한 빙산은 이미 핫핑크를 입고 물살을 가르고 있을지 모를 일. 그곳에선 수영 실력도 출중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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