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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at, 더 높이 날자 아기야

: 남다른 아이의 아빠

by 윌버와 샬롯

픽사는 최근 '아시아계 증오 범죄 반대'의 뜻을 담아 두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했다. 그 두 편은 Wind와 Float이다.


2일(현지시간) 픽사는 "모든 형태의 반아시안 증오 행위에 맞서 (우리는) 아시안과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와 연대하고 있다"며 "우리는 (사회의) 포용력을 증진하기 위해 아시안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단편 애니를 널리 알리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픽사는 기존의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제공하던 '윈드'와 '플로트'(Float)를 유튜브 채널을 통해 무료로 공개한 것이다.

http://naver.me/xJNNvgRS
(기사 발췌)


애니메이션에 아시아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증오 범죄를 멈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민족임을 강조하는 문화 배경 속에서 살았다. 그때는 순수혈통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얘기는 달라진다. 노래도 있지 않나.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그러니 어찌 순수혈통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교통수단이 형편없던 그 예전에도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다 할지라도 인간은 세계를 누볐었다.


하물며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그래도 우리보다 좀 더 마인드가 열려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이전부터 자연스럽게 다인종 다민족이 모여 국가를 이루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산 세월이 얼마인데 여전히 인종차별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건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어떤 대상에서건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에서 우월의 위치를 점유하려는 인간 본성의 발로 걸까.


코로나 시국에 화풀이 대상이 그들은 필요했던 것일까. 불안과 자기 고통에 똑같이 힘겨워하는 이웃에게 분풀이하는 꼴이다. 비단 유럽이나 미국의 문제만도 아니다. 메르스 같은 다른 질병이나 난민과 같은 이슈가 대두됐을 때 우리는 어땠나. 암암리에 특정 국가인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다소 있었다. 사람이기에 잠시 잠깐 두려움으로 원망의 대상이 마음속에서 생길 수는 있으나 그것을 그대로 폭력과 같은 방식으로 밖으로 표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 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어떤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을지라도 픽사가 보내는 메시지가 조금이나마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두 편 중 Float를 보면서 그림책 <배낭을 멘 노인>이 바로 떠올랐다. 단편 애니메이션이 먼저 나온 그림책인데 중력이 적용되지 않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다. Float에서도 비슷한 장치가 등장한다. 소재는 같아도 그러나 그 둘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Float 속 아빠는 따스한 어느 날 아이의 첫걸음마를 함께 한다.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예쁜 아가였다. 하지만 그는 바로 깨닫는다.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에 아빠는 그 모습을 경이롭게 쳐다보지만 이내 표정이 바뀐다. 아이의 다름을 눈치챈 이웃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인생의 무게를 은유한 그림책 속 노인은 평생 자신의 비밀을 감추며 힘겹게 살아왔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배낭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노인은 훨훨 하늘을 날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Float의 아이는 시종일관 해맑게 웃고 있다. 단 한순간만 그렇지 못했다. 아빠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때는 아이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은 마치 평생 배낭을 메고 산 노인의 표정과 흡사했다.


이 세상의 대다수 부모는 평범하면 비범해지라고 하고, 특별하면 남들과 같아지라고 한다. 부모는 왜 그렇게 변덕을 부리는 걸까.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인간은 그렇게 가지 않은 다른 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나 보다.



여기 Float의 아빠는 두려웠을 것이다. 아이가 받게 될 차가운 시선, 필요 없는 과도한 관심이나 경계심에 지레 겁을 먹었을 것이다. 평범한 아빠라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수순이다. '서프라이즈!' 하면서 아이의 남다름에 환호를 지를 수 있는 강심장 부모가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비슷한 설정의 그림책을 미리 봐서 그랬는지 나는 아빠가 아이의 가방에 돌을 넣는 장면에서 아이의 미래가 걱정됐다.


커가는 만큼 그 무게는 또 더 무거워지겠지. 아이는 지금은 가뿐한 배낭을 메고도 걸을 수 있으니 싱글벙글 웃으며 산책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 시간은 언제까지 가능하게 될까. 아이는 앞으로 웃을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겠지.


그러나 반전이다. 역시 부모는 위대하다. 시간이 걸리고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아빠는 깨달았다. 아이가 진정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아가게 해야 할지를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큼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일이 또 있을까.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인간이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전쟁이 왜 있고, 단절이라는 게 왜 존재하겠는가.


아빠가 먼저 아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세상도 그렇게 바뀌게 될 것이다. 어떤 풍파가 있더라도 든든한 부모라는 버팀목이 있다면 아이는 힘을 내고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난 이렇게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을 보면 아이는 의지만 있으면 땅에 발을 내딛고 걸을 수도 있는 아이였다. 그러고 보면 두 가지 모두가 가능했던 대단한 아이다. 직립보행 그리고 공중부양. 알고 보면 아이는 요즘 말로 세상의 인싸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인 것이다.


꼭꼭 감추고 평생 배낭을 메고 산 노인에게 Float의 아빠 같은 사람이 없었음이 못내 아쉽다. 노인도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Float의 아이가 비상하는 모습은 너무나 자유롭고 예쁘다. 아빠는 아이와 함께 그네를 타며 그 자유로움을 같이 느끼며 환호한다.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받아들이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아이의 단점이라고 여겼던 점이 타인에게선 특별한 장점이라며 다른 시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아, 생각을 전환하면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듣기 좋으라고 내게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난 그때 배웠다. 관점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아이의 날개를 꺾지 말자. 비상할 수 있도록 아이를 꼭 안고 그네를 같이 타 주자. 아이가 내 손을 놓고 저 멀리 날아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묵묵히 지켜봐야만 하는 전문 짝사랑꾼 부모이니까.


애니메이션 끝에 퍼져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처럼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자유로워지길.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틀어진 시선들도 훌훌 날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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