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천하.3

by 최해이

‘백일천하’의 이름표에는 내 이름인 ‘희월’ 이 적혀 있었다. 아끼는 스티커도 그 주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소유주는 아니었지만, 여간 탄 것이 아니라 승마를 배우러 다니는 회원들도 나만 행차했다 하면 백일천하는 고르지도 않았다. 암묵적인 규약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를 마주한다고 해서 반갑다며 배를 까뒤집거나, 애교를 부리거나 따라오지는 않았다. 늘 무표정한 얼굴로 각설탕이나 당근을 받아먹을 뿐이었다. 다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눈동자가 유독 나를 바라볼 때면 옻칠을 한 듯 반작인다. 넓적한 턱을 가벼이 툭툭 두드리면 눈을 깜빡인다.


“꼬맹아- 혼자 재갈이랑 안장 채울 수 있겠나?” 마사를 관리하시는 반장님이 소리쳤다.

“저 꼬맹이 아니거든요!”


가지런한 치열, 깊숙한 입가에 재갈을 가져다 대자 싫다는 듯 고개를 위로 치켜든다. “으악, 백일아.” 버둥거리며 재갈을 겨우 채우고 나면, 안장을 올리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여전히 성장하는 중이었다. 나는 뭐든지 스스로 하고 싶어 했다. 말을 타고나서 씻기는 것도, 털을 빗는 것도, 풀을 먹이는 것도, 마장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배설물을 치우고, 톱밥을 다시 까는 것도... 외동으로 태어난 내게 백일천하는 동생 혹은 오빠나 다름없었다. 어딜 가나 동생이나 오빠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타인의 평가는 백일천하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렇게 뭐든 스스로 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중학생이 되었고,

계절이든 내 마음이든 진눈깨비가 잔존하는 모든 초록 생명체들을 덮을 정도로 추운 한겨울이었다.

사춘기가 온 것이었다.


백일천하의 온기를 떠올리면, 그 많고 많은 날들 중 늘 이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온도, 습도, 공기의 흐름 그 모든 것이 말이다. 공기는 외롭지 않은 사람마저도 외롭게 느끼게 할 정도로 아렸고, 아무리 핫팩을 끌어안고 있어도 바람 한 번에 식어버리는 혹독한 날이었다.


”희월아, 아부지는 언제 오신다냐?“

”곧이요! 저 백일이 좀만 더 타다가 정리하고 갈게요“


열다섯 살의 나는 늘 혼자가 아니었다. 무던히도 서 있는 백일이의 목덜미를 툭툭 친다.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기 전까지의 빈자리는 늘 백일천하가 채워주었다. 백일천하를 이루는 모든 것들에는 나의 손길이 묻어 있다. 가지런히 땋아져 있는 흑색의 머리카락도 말이다. 수컷이었지만, 제법 얄쌍하게 생겼기에 잘 어울렸다. 사실은 앞머리와 갈기를 자를 때, 아둔한 손길로 잘못 잘라서 삐뚤빼뚤한 바람에 뭐... 그런 이유도 있기는 하다.

마방 앞 한가득 매달려있는 말 머리 모양의 메달을 손으로 만졌다. 문을 열 때마다 부딪히는 청아한 종소리는 무조건 백일이의 것이었다. ‘제10회 전국승마체육대회 마장마술 금상’, ‘제13회 **승마대회 장애물 금상’…. 상금은 내 것이었고 상장도 내 것이었으니, 매달은 백일천하에게 주었다. 아 그리고 프랑스산의 최고급 각설탕까지...


조용한 마방에서 백일이를 씻기고 말리고, 노을 지는 하늘 아래에서 풀을 뜯어먹였다. 나는 고삐를 잡은 채 쭈그려 앉아 눈앞을 바르작거리는 개미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제법 추워졌는데 아직도 개미가 있나. 그러고 보니 한 마리뿐이다. 아무래도 다리를 다친 모양이다.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개미를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옮겨주고 주머니에 남아있던 각설탕을 앞에 내려놓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단 몇 분이라도 애정을 가진 것 앞에 있으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삼천포에 빠진 인간 때문에 먹던 풀을 두고 끌려 온 백일이는 신경질이 났는지 푸르르 거린다. 겨울을 예고하는 가을바람이 날카롭게 백일이의 땋아진 머리를 풀어헤친다.


“목욕도 했는데… 감기 들겠다 백일아”


사춘기인 내가 유일하게 나의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존재였다.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백일이의 굵다란 목에 둘러주었다. 사람의 목에는 한 서너 번 돌아가던 목도리였지만, 백일이에게는 한 번조차도 겨우 둘러졌다. 풉. 제법 웃겼다. 보온은 개나 주라 해.


백일이를 마방으로 보내자, 정사각형의 원룸 같은 마방의 한편에 곧장 앉아버린다. 이게 너의 세상 전부라니, 되려 그런 건 신경도 안 쓴다는 백일천하는 열어둔 창문 새 들어오는 상현달의 빛을 받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근데 여기 좁아서 엄청 따뜻할 것 같긴 하다. 내가 목도리 줬으니까 열기 좀 나눠주라.“


앉아있는 백일이의 배 옆에 기대어 앉았다. 등에 닿은 백일천하의 단단한 배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인간의 체온 36.5도, 말의 체온 37도.. 별반 차이가 없지만 둘이 함께 몸을 붙이자면 73.5도가 되는지. 몸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백일이의 따뜻한 배의 온기를 척추 하나하나로 느끼며 눈을 감았다.


백일천하는 바닥에 고개를 붙였다.


주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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