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 1970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러브 스토리.’ 무려 50년 가까이 전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못했고 또 10살이 넘어서야 보았다. 흑백 티브이가 주류인 시절, 10대 초반에 티브이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 시간에.
아마 3번 본 것 같다. 일요일 밤 10시쯤 시작하는 ‘주말의 명화’ 시간에 티브이에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부모님이 있는 안방에서 이부자리 펴 놓고 처음에는 민망하게 그리고 나중에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봤다. 아버지가 한심하게 나를 보더니 끝나자마자 빨리 니 방으로 가서 자라고 했다. 그러면 퉁퉁 분 눈을 가지고 내 방으로 가서 더 울었었다. 10대 초반 몇 년에 거쳐 흑백으로 2번, 칼라로 1번 보았던 것 같다. ‘주말의 명화’는 재방송을 많이 했다.
그때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게 되었다. 막 초등학교 고학년을 지나 중학교로 진학하던 시절이다.
첫 장면은 남자 주인공 올리버가 뉴욕 센트럴 파크 테니스장 앞에 혼자 앉아 아내 제니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 남자들만 다닐 수 있었던 미국 하버드 대학교 학생 남자 주인공 올리버는 옆에 있던 여자 대학교 레드 클리프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까탈스러운 여대생 제니를 만난다.
그때 둘이 나눈 대사를 나는 로코 드라마의 대가 김은숙 작가가 쓴 줄 알았다.
올리버가 사서인 제니에게 시험공부에 쓸 책을 빌리려 하자 제니가 하버드 도서관으로 가라고 까탈스럽게 얘기하며 시작한다.
올리버: 왜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죠?
제니: 당신과 커피를 안 마실 테니까
올리버: 마시자고 할 생각도 없는데...
제니: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죠.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라는 걸 제니가 이렇게 돌려서 말한 거다. 딱 김은숙 작가의 로코 대사다. 제니가 너무 재치 넘치는 거다. 게다가 이어지는 장면에서 둘은 커피를 마시는데 제니는 올리버의 이름을 묻다가 하버드 대학에 배럿 건물을 기증한 부자의 아들인 걸 알게 된다. 여기서 제니는 다시 한번 재치가 넘친다.
제니: 그럼 내가 지금 배럿 빌딩과 커피를 마시는 건가?!
올리버: (한심한 눈빛으로 보며) 당신이 지금 나를 얼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나랑 커피를 마시는 거예요?
제니: 당신 몸(체형)이 좋으니까.
올리버가 제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70년에 나왔으니 원작자 에릭 시갈이 김은숙 작가의 톤을 따라 했을 수는 없고 김은숙 작가가 배운 것 같다.
이 영화에서도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건 부자인 올리버의 아버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올리버의 반항인데 굉장한 부자에다가 아들의 출세만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올리버는 엄청나게 반항한다. 제니 앞에서 아버지를 조롱하고 제니와 결혼하기 위해 아예 인연을 끊어 버린다.
이 대목에서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당시 미국 청년들 특히 대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등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세대였다. 아버지가 은행 총재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었다고 소리 지르는 올리버의 대사에서 그걸 엿볼 수 있다.
반면 제니의 아버지에게는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는 이탈리아식 빵집을 하는 이탈리아 이주자인데 같은 백인이지만 정통 앵글로 색슨족인 올리버와 비교하면 1960년대에는 백인 비주류이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백인들이 주류이고 그 외에는 백인일지라도 주류일 수 없던 당시 미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제니는 프랑스로 유학 가 음악 공부를 계속할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올리버와 결혼하기 위해 포기한다. 아버지와 연을 끊은 올리버는 스스로 돈을 벌어 법대 공부를 계속해야 했다. 제니가 프랑스로 가겠다고 하자 당황한 올리버가 당장 청혼하는 장면은 어릴 때 볼 때 참 뭉클했다. 그때 나는 언젠가 나에게도 멋진 남자가 나타나 저렇게 단호하게 청혼한다면 내 꿈 따위는 포기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에는 유명한 대사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Love means you never having to say sorry)’가 2번 나온다. 첫 번째는 제니과 올리버가 아버지 문제로 크게 싸운 후 제니가 집을 나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이다. 올리버가 미안하다고 말하자 제니가 하는 말이다. 이때는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이미 용서했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 제니가 죽은 후 병원에서 나오는 올리버가 아버지를 만나자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때 올리버가 다시 이 말을 반복한다. 이때도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이미 용서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제니가 죽음으로써 올리버는 아버지와 화해한 거다.
영화는 제니가 백혈병에 걸러 25살의 나이로 죽고 올리버가 첫 장면에서처럼 눈 덮인 센트럴 파크에 앉아 슬퍼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 올리버의 가슴 안에서 영원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게 되었다.
막 중학생이 된 나는 사랑에 대한 환상이 충만한 시기였고 하이틴 로맨스를 가끔 읽었다. 커서 이런 사랑을 기필코 하리라 결심했었다. 결심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실제 나는 짝사랑에도 빠졌다.
옆 학교 남학생을 짝사랑한 게 아니라 학교만 왔다 갔다 하는 모범생답게 학교 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하얀 얼굴, 마른 몸매, 길고 가는 손가락을 가진 수학 선생님이었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수학 시간만을 기다렸지만 정작 수업 시간에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한 번은 복도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몰래 보다가 걸레 걸대에 걸려 크게 넘어져 코피가 깨진 적도 있다.
이 영화가 크게 흥행한 이후 1970년대 왜 그렇게 한국 영화에서는 여주인공들이 백혈병으로 몽땅 죽는지. 영화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런 멜로 영화가 많았다. 이 영화가 신파 멜로 영화의 시작이었다.
‘러브 스토리’에서는 여주인공이 죽음으로써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진다. 남자 주인공 올리버는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아내가 없어짐으로써 사랑이 순수하고 완벽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오래된 이 로맨스 영화는 완전한 사랑의 끝판왕을 보여 준다. 사랑은 기억 속에서 완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