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남기
일러스트레이터를 준비하면서 짬짬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단기 일은 시간적 부담이 적기 때문에 선호하는 편이다. 그날도 마트 판촉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물건을 진열하고 있는데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새로운 메일 도착 알림. 미리 보기를 통해 짤막하게 압축된 내용은 즉 작가님께 그림을 의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말도 안 돼!”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앞치마를 두른 채 방방 뛰어다니며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첫 의뢰. 그렇게 기다리던 내 그림이 필요하다는 메일이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달려와 컴퓨터를 켰다. 메일을 꼼꼼히 읽고 또 읽은 다음 답장을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더뎠다. 답장이 올 때까지 마음을 다잡았다. 첫 번째 일을 따내기 위해 나는 뭐든 맞춰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클라이언트에게는 정해진 예산과 기간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맞춰줄 수 있는 작업자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첫 시작이 간절했다. 돈보다는 이력, 실제 일을 하여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했다. 우선 첫 번째 일을 무사히 끝내고 이 경험으로 차차 더 좋은 일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30분 뒤 답장이 왔다. 내가 올렸던 그림 스타일이 정말 마음에 들어 비슷한 콘셉트의 그림이 꼭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조건도 나쁘지 않아 기쁘게 받아들였고, 몇 차례 메일이 오간 뒤 작업을 확정 지었다.
그림 콘셉트와 내용을 전달받고 책상에 앉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동안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렸던 것과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그리는 그림은 달랐다. 나에게 의뢰를 한 클라이언트에게 꼭 맞는 결과물을 보내야만 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나는 일을 받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는 거다.
나의 첫 번째 외주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며칠 밤을 새웠다. 아침 일찍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출근하고 오후에 돌아와 새벽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아침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시간이 갈수록 체력에 한계를 느꼈지만 두 가지 다 대충 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작업을 이어나갔다. 첫 의뢰든 아르바이트든 나를 고용해 준 소중한 곳이었다.
열흘이 지나고 마침내 약속했던 그림을 넘길 수 있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작업했고, 다행히 클라이언트는 만족해했다. 시작이라는 희망이 보였다. 내 그림이 수요가 있다는 것과 일러스트레이터로써 첫 발을 내디뎠다는 성취감에 힘든 줄도 몰랐다.
첫 번째 의뢰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는 한동안 들떠 있었다. 내 일러스트가 들어간 홈페이지를 계속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심지어 즐겨찾기까지 해놨는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본다는 생각에 실실 웃음이 났다.
‘앞으로 이렇게만 일이 들어온다면!’
그러나 그 뒤로 메일은 오래도록 잠잠했다. 텅 빈 메일을 눌러보고 스팸메일함까지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몇 차례 의뢰가 들어오긴 했지만, 견적 금액을 써서 보내면 답장조차 없을 때도 많았다. 초보 일러스트레이터에게 협상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거절의 답장이라도 보내주면 좋으련만. 쓴웃음을 한번 짓고 다시 포트폴리오를 다듬었다.
'나 말고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주 많고 선택의 폭은 넓은 거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림을 받기 위한 그림 그리기는 계속되었다. 평소처럼 습작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자료를 모았다. 예전에 그리다 말았던 개인 작업을 다시 그려보기도 했는데, 예전 작업을 보완하면서 좀 더 나은 그림을 그리려고 연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열매를 맺기 전 새싹의 모습이었다. 작은 결실은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