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 Chagall (1887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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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컬렉션. Marc Chagall(1887 러시아 제국 현 벨라루스 ~ 1985, 프랑스 니스)
1910년 여섯 작품으로 본 샤갈은 유대교 하시디즘과 가족 그리고 앙데팡당 전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띌 만한 작품은 자신의 누이를 모델로 한 Aniuta이다. 아버지 샤갈이 내동댕이친 27 루블을 식탁 아래에서 줍고 시작한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샤갈이 선택한 화가의 길을 가족 모두 응원하고 있다는 방증 같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1907년 마리아스카( https://brunch.co.kr/@hfeel/990 )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샤갈을 응원하고 격려하게 된 계기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렇게 가족의 힘은 샤갈이 앙데팡당 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용기의 원천이었고, 그 결과 또한 흡족했다. 비테프스크 - 상트페테르부르크 - 파리로 이어지는 샤갈의 그림 여정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샤갈 작품에는 입체파 또는 야수파 흔적은 없었고(이 여섯 작품만 봐서는 말이다) 벨라도 없다. 해서 이 시기 샤갈 작품은 한편으로 1911년부터 등장하는 작품과 경계를 분명히 그을 수 있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11년 L'Atelier 작품에서는 앞서 말한 입체파 야수파 영향은 물론 벨라라는 인물이 샤갈의 작품에 본격적인 뮤즈로 등장하는 계기로 삼을만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1910년 샤갈은 기분 좋은 한 해였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스승 Bakst의 가르침이었던 유대인 이미지를 작품 오브제로 승화시키는 기염을 토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갈은 답답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 거리는 에너지가 정작 이처럼 표현하는 것인가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샤갈은 그 꿈틀거리는 정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대인이란 삶의 과제를 어떻게든 자신만의 화풍으로 일궈내고 싶은 욕망이라는 것을 말이다. 신에게서까지 버림받고 싶지 않은 젊은 샤갈의 그 심경의 폭발, 1911년 작품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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