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 Chagall (1887 러시아 제국 - 1985 프랑스)
1914년 작품감상
4월 컬렉션. Marc Chagall(1887 러시아 제국 현 벨라루스 ~ 1985, 프랑스 니스). 1914년 작품 감상
1914년, 샤갈은 고향 비테프스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슈투름 갤러리 전시회 성공으로 자신감이 생긴 샤갈이 약혼자 벨라를 보러 갔다가 닥친 상황이었다. 벨라의 축하와 사랑을 한껏 받는 점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이 행복이 여기서 끝날 것도 같아 샤갈은 불안했다. 이런 샤갈의 심경이 1914년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그중 심드렁하게 째려보는 표정, 미간을 찌푸린 채 마치 사진 찍기 싫은 데 억지로 사진을 찍어야 했던 내 초등학교 입학 사진을 연상케 하는 자화상 표정은 재밌다. 근엄한 표정의 자화상은 되레 슬프다. 그런 샤갈에게 벨라는 역시 뮤즈였다. 뺨을 들이밀고 애교를 부리는 샤갈 모습은 행복하기 그지없다(Self-Portrait in green). 여기까지면 딱 좋은 데 1914년 샤갈 작품은 '군인' '랍비' '가족' '비테프스크 거리 풍경'을 강박적으로 담고 있다는 한 비평가 말이 떠오른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알껍데기로 만 여긴 일이 깨지지도 찢어지지도 않고 고무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자 그 답답함은 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눈초리가 사나워진 샤갈에게 신은 다시 한번 가혹했다. 신의 선물이라던 출신 성분이 핍박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어둠을 틈타 고향을 탈출하는 행렬은 정신 착란을 일으킬만한 공포였다. 1914년 이 현실적인 정신적 고통을 샤갈은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것이 강박을 일으켰다면 딱히 반박할 말도 없다. 다만 그 시련을 겪으면서 남긴 작품이 자화상이라고 할 뿐이다. 이를테면 이때 샤갈의 기록물인 셈이다. 하지만 기록물로만 보기에는 자화상 속에는 새것도 있다. 표현 기법과 색채는 입체파와 야수파 특징을 답습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작품 내러티브와 오브제를 드러내는 방식 역시 새롭게 더 새롭게 탐구하고 도전하는 샤갈이 있었다(Self-Portrait in green). 현대 회화에서 시적 은유를 완성했다고 평한 초현실주의 창시자 앙드레 브르통의 평가의 시작점을 샤갈은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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