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있는 도전, 포기하지 않는 열정, 뚝심 있는 한우물 파기 필드에서 '전 100번 가까이 떨어졌어요.'는 클리셰 같은 문장으로 쓰인다. 셀 수 없이 많은 좌절을 끝으로 무언가 해낸 사람들의 말에선 '될 때까지 한' 사람의 기개가 느껴진다. 어떤 분야든 합격수기는 검색으로 쉽게 찾아 읽어볼 수 있지만 100번을 도전하고 포기하기로 결정한 사람의 수기는 보기가 힘들다.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우물파기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이 글이 일단은 지금까지의 안합격수기가 될 수도 있겠다.
몇 번이나 서류에서 떨어졌을까, 한 번 세어볼까 했다. 4학년이 끝날 때쯤 아나운서 지원서를 넣기 시작한 이래로 모든 합격문자, 불합격 문자를 캡처해 놨기 때문에 마음먹으면 셀 수 있다. 한 20개까지 세다가 벌써 기분이 저조해져서 그만뒀다. 캡처를 하기 시작한 이유는 내가 몇 번만에 합격했는지 세기 위해서라기보다 모든 결과통보 문자가 성젹표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법. 이 모든 문자는 내 시간과 노력의 지출증빙이다. 이렇게 많아질 줄은 몰랐지만.
졸업하기 전 덜컥 합격해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퇴사 이후 반복적으로 맛보게 된 서류탈락의 고통은 찌릿했다. 각오가 가벼웠던 것이 아니다. 모두가 퇴사를 말렸으니 이런 어려움은 예측가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는 후에 기회가 된다면 써봐야겠다. 진심으로 난 다시 금방 합격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이렇게까지 서류에서 많이 떨어질 줄도 몰랐다. 물론 한 직종에만 원서를 넣었던 것이 아니라 많이 내는게 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됐든 한 50번째의 도전에서 떨어지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1. 내가 무언가를 확실히 잘못했다. 노력이든, 실력이든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 자책/ 후회/ 열등감/ 연습
2. 전형에서 필요한 전략과 트렌드를 모른다. -> 전문가 방문을 통한 학습
1과 2를 반복하면서 합격률이 조금씩 올라갔다. 이 과정들을 통해 남들과 나를 일렬로 세워놓고 스스로 평가했다. 경력, 키, 나이같이 이미 정해진 것들이 있었다. 발성, 발음, 말하는 방식, 말솜씨, 스타일링, 외모 등 노력으로 수정이 가능한 것도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 유머감각, 신체 비율, 기운과 기세는 노력해도 수정이 어렵다고 느껴졌다. 상대평가에서 선택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 보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항상 고통스러웠다.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외모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의상과 스타일에, 내가 풍기는 느낌, 말투, 말하는 습관,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방식, 성격의 장단점, 심지어 기울어져 있는 고개나 굽은 어깨까지. 사소한 것을 알아내고 고쳐야 할 때 피곤하기도 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고 고쳐지지 않는 것도 있다. 샅샅이 뒤져서 내 안의 좋은 싹을 찾아내려고 했다. 알게 된 것 자체가 어떤 쓰임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알게 됐다.
최근에는 불합격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추가했다.
3. 대진운이 안 좋았을 수도 있다. ->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
3은 내게 조금은 핑계나 합리화처럼 느껴졌는데 높은 전형에서 떨어질 때 어쩔 수 없이 3이라는 이유를 만들었다. 정신건강에 아주 조금은 이롭고 또다시 털고 일어나기 위해서 필요했다.
실망은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에 크랙(crack)을 남긴다. 실망하는 순간, 내가 가졌던 기대의 크기를 확인하게 되고 더 속상해지니까. 사람마다 마음의 재질이 다를 테니, 종이 같은 누구의 마음은 찢어지면 테이프로 다시 붙이는 시간이 필요하고 유리 같은 누구의 마음은 실망으로 깨지면 유리조각을 치우고 완전히 녹였다가 새롭게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는 문장을 받으면 내 마음은 콜라캔처럼 찌그러졌던 것 같다. 발로 콱 찌그러트린 정도는 아니고 탈락할 때마다 조금씩 찌그러졌는데 어찌저찌 바깥쪽으로 힘을 줘서 펴내면서 지냈다. 다시 같은 회사에 원서를 내면 남아 있는 내 크랙의 흔적이 드러날까 봐, 그게 좋지 않게 보일까 봐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는게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근데 얼마 전에 어떤 유튜브에서 연예인 장도연 님이 말한 걸 듣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뭔가 원하는 대로 잘 안 됐을 때 '꿈꿨네'라고 생각한다고, 그래야 다음 걸 할 수 있다고.
축구에서는 크랙이 경기력과 경기결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수를 지칭하는데 쓰인다고 한다. 회사와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났을 때 내 크랙이 축구에서의 그 크랙으로 쓰이게 될 줄 누가 알겠나. 지금은 다음 걸 하기 위해서 장도연 님의 '꿈꿨네' 전략이나, 박민규 작가의 소설 <카스테라> 전략을 써야겠다. 냉장고에 걱정, 고민, 크랙까지 싹 접어서 넣어버리고 나중에 열면 따뜻하고 포근한 카스테라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
내일은 되겠지 오늘은, 일단 카스테라 전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