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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형훈 Aug 11. 2023

빠르게, 빠르게

   감정 소모가 확실히,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제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오늘은 몸과 마음이 아주 가볍다. 분명 어제 야오린 씨와 진한 상담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웬일로 맞은편 침대의 주인이 없다. 보통은 그가 자고 있을 시간인데 말이다. 그가 없는 이유가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뜨자마자 그 차갑고 음침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오늘따라 햇살도 내 몸에 잘 스며드는 기분이다. 조만간 몸에서 새싹이 자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실에서 얼굴을 확인해 보니 새싹 대신에 검은 싹들이 턱과 볼에 많이 자라 있었다. 온몸을 청소할 시기가 온 것이다. 샤워는 오후에 하기로 하고, 열차에 탑승한 첫날에 받은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정리했다. 나는 남들보다 수염이 굵은 편인데도 이 면도기는 생각보다 성능이 좋아서 털들을 잘 갈아 냈다. 턱이 매끈매끈 해졌다. 이만하면 괜찮겠지.

   지금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운동해 보기로 했다. 오늘도 ‘새로운’ 향하자고 어젯밤에 다짐했던 바이다.

   어제 오후, 간호사실을 찾아 헤매다가 수영장을 가리키는 안내 팻말을 발견했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꿈틀거렸다. 수영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으리라. 그리고 가슴의 꿈틀거림은 몸이 ‘수영장’에 관한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수영장으로 향한다. 에리히 프롬의 책처럼 기억이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영장은 광합성 공원을 지나, 직원실을 넘어서 그다음 칸에 있다. 어제는 무슨 정신에 여기까지 왔을까. 목이 마르다 못해 갈라지고 있는 여행자가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듯이, 간호사실을 애타게 찾다 보니 이곳에 도달했으리라. 그리고 우연히 수영장을 발견했다. 아니면 ‘우연’이 아니라, 내게 몇 주 뒤에나 발견될 수영장이었지만, 열차의 시스템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을 수도 있다. 빠르게 촉진한 것이다.

   수영장의 이름은,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광합성 수영장’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합성 수영장 6’이었다. 이곳이 열차의 6번째 수영장인가보다. 이 수영장 내에도 빛의 사각지대는 없으리라. 카운터에 환자 번호가 적힌 팔찌를 보여 주고, 그 팔찌를 직원에게 맡겼다. 그러면 직원이 수영복과 수영모, 물안경 등을 알아서 준비해 준다. 사이즈도 보나 마나 딱 맞을 것이다. 탈의실에는 캐비닛이 여럿 있었다. 비어 있는 곳은 손잡이 부분에 초록색 조명이 들어오고 있다. 애초에 이 모든 캐비닛에는 훔쳐 갈 만한 것이 없다. 있는 것이라곤 다 같은 모양의 하얀색 옷가지와 회색 속옷뿐이다. 성(性)도착증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라면 남의 체취가 묻어 있는 옷을 훔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속옷까지 모두 캐비닛에 벗어 넣고, 온몸에 착 달라붙는 흰색 경기용 수영복을 입었다. 다행히 속이 비치지 않는다. 이상하게 그리운 감각이다. 수영모를 쓰고 그 위에 물안경을 걸쳤다. 그리고 문이 잘 잠겼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돌아왔을 때, 캐비닛에서 팬티만 사라진 상태라면 그건 꽤 소름 돋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는 탈의실에서 나와서 대각선으로 이동하는 투명 무빙 워커에 올랐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도착했을 때는 아름답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수영장의 모습이 보였다. 열차의 한 칸을 전부 수영장으로 사용하는지 상당히 넓었다. 작은 호수를 보는 것 같다. 물이 햇살에 반짝이고, 그 반짝이는 액체 위에는 다양한 세대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을 보니깐 무빙워크를 타고 올라온 이유를 알아챘다. 천장이 평소보다 낮아 보이는데, 이는 수영장에 물을 담아 놓을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기 한쪽 구석에는 어린 환자들을 위해서 물이 깊지 않은 풀(Pool)이 있었다. 똑같은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우울증을 앓는 친구들이라 장난도 소극적이고, 혼자서 노는 비율이 높다.

   바닥은 속이 뿌연 유리로 되어 있었고, 추가로 미끄럼 방지를 처리했는지 표면이 까끌까끌하다. 그래도 살짝 미끄럽긴 했지만, -착 달라붙은 수영복이 근육의 자리를 잡아주고, 그 근육들을 적당히 긴장시켜 주고 있어서 아슬아슬한 감각은 없었다.

   나는 수영장의 마지막 레일로 이동했다. 첫 레일과 마지막 레일만 다이빙해도 괜찮다는 문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에 익은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소음이 유리 벽에 부딪혀 공간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옆 레일 끝에는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의 몸매를 가진 사람이 부드럽게 헤엄치고 있었다. 수영을 배운 사람 같았다. 팔 동작을 하나하나에 정성 들여서 물을 가르고 있었다. 수영 외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듯이 말이다. 그녀는 맞은편 벽을 살며시 터치하고 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물안경을 벗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알고 보니, 열차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던 ‘화려한 미인’, 그 사람이었다. 그녀가 수영모를 쓰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그녀의 정체성의 집합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붉은 빛의 갈색 머리를 확인할 수 없어서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늘은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 쪽이 아니라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를 변태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내가 탈의실에서 생각했던 성도착증 인간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내게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다. 나는 늘 그랬듯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돌리고, 준비운동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안경을 꽉 조여서 쓰고, 그대로 스타트 단상에 올라서 다이빙했다. 어색하게 뛰어오른 첫 동작, 나도 모르게 펴지는 팔에, 날을 세우는 손, 그리고 활처럼 당겨지는 등을 유지한 채 물속에 잠겨 들어갔다.

   ‘나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오자 20년 정도 젊어진 내가 되었다. 내 싱싱한 손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지금, 빛의 창(spear)이 물속 여기저기를 뚫고 있는 게 보인다. 방금까지 환호성이 들려오던 것 같았는데, 이곳은 아주 고요하다. 나는 앞을 향해 천천히 유영(遊泳)했다. 빛의 창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빛의 창은 빛의 오로라(aurora)로 변해 있었다. 숨이 막혀 물 밖으로 고개를 빼내자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온다. 우레와 같은 소리에서 드문드문 내 이름이 들려온다. 갑자기 온몸이 긴장하기 시작했고,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유영을 그만두고, 전속력으로 헤엄쳤다. 맞은편 골을 향해 팔을 휘젓고, 힘껏 다리를 찼다. 차가운 물을 가르고 있었지만, 몸에는 스멀스멀 열기가 차올랐다. 이윽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도착지점의 벽을 터치했다.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환호성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 다급하게 달려와서 내게 고함을 친다.

   “뭐 하는 거야! 턴(Turn) 해서 다시 가야지! 지금 50M 경기 중이라고!”

   나는 대회의 한복판에 있었다.

   “늦지 않았어. 빨리 가!”

   나는 물속에서 벽을 힘껏 밀어 차고 내가 출발한 지점을 향했다. 앞에 보이는 녀석들을 앞지르고자 힘껏 팔을 젓는데, 이상하게 속력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 호흡을 하고 있는데도 숨이 막혀 온다. 온몸의 혈관이 수축하는 게 느껴진다. 아까의 실수로 몸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것이리라. 혈관이 계속 좁아져서 발끝이 저리기 시작한다. 팔도 저려서 휘젓는 게 마음 같지 않다. 좋지 않다. 발바닥에 감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발바닥에 굵은 근육 띠가 맺힌 게 느껴진다. 팔만 휘저어서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더욱이, 발바닥의 통증 때문에 자세가 이상해져서 몸이 점점 가라앉는다. 호흡 조절을 잘못해서 몸에 산소가 별로 없었다. 함성이 들리지 않는다. 주변은 너무 고요하다. 나는 양손을 오른발에 가져간 채로 파닥거렸지만, 그럴수록 내 몸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빛의 오로라가 여름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처럼 물속을 아른거린다. 아름답다. 예쁘다. 영롱하다. 몸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라이프가드가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다만, 진정한 골에 터치하지 못한 것만 신경이 쓰인다. 저 벽만 터치하면 모든 게 끝인데 말이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새하얀 천장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겨 주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가족들이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나와 눈을 마주쳤고, 순식간에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졌다. 머리카락에는 무게감 있는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어른이 된 나는 물에 둥둥 떠 있는 채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렸을 적 학교를 대표하던 수영선수였다.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다는 내 놀이터였고, 그 덕분에 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물과 약한 파도가 주는 스릴을 즐겼다.

   초등학교에 수영부가 개설된다는 소식에 바로 가입했다. 어머니한테 졸라서 로봇이 그려진 수영복도 샀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수영장으로 가서 물속을 누비며 살았다. 어린이 특유의 유연함이 있어서, 내 신체는 고도리처럼 팔딱거리기 좋았다.

   수영부에 들어가서 2년 정도가 흘렀을 때, 학생별로 기록을 체크하여 대회에 나갈 종목을 정했다. 나는 크롤(Crawl) 영법을 잘 구사했기 때문에 ‘자유형 50M’ 경기를 나가기로 했다. 크롤은 수영법 중 가장 빠른 영법이다. 거기에 ‘50M’는 단거리라서 경기 자체가 빠르게 진행된다.

   그렇게 대회 준비를 착실하게 했고, 경기 당일이 찾아왔다. 여기서부터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까 다이빙을 하여 물과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긴장해서 발에 쥐가 났고, 물속에 가라앉았다.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 뒤로도 수영은 계속했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비운의 주인공처럼 물 공포증이 생겼다가, 그걸 극복하고 전국체전에서 우승, 을 하지는 않았고, 물론, 대회는 나가지 않았지만, 그냥저냥 수영장에서 계속 놀았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까지 하다가, 학교가 이사를 하면서 수영장이 사라졌고 나도 자연스럽게 수영할 일이 없어졌다.

   어머니가 내 심연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그 사고 이후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째서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았을까. 쉽게 잊어버릴 만한 기억은 아닌데 말이다. 선명한 기억도 흘러가는 시간에 묻혀 버리기 마련인가. 식빵을 씹으며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기억세포가 아닌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 간신히 떠오른 기억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이 무섭게 다가온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도파민 분비량이 적어져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나는 며칠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방금 걱정들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 미리 걱정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녁에 예정된 회식에 대비하여 위 보호제를 미리 먹어 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시 물속으로 잠수했다. 빛의 오로라가 환자들이 일으키는 물살에 따라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고 있다. 밖에 있는 대형 창문을 통해 노을빛이라도 스며들면 더욱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광합성 열차가 멈추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기회가 찾아온다면··· 노을빛으로 물든 물속을 천천히 유영하고 싶다.


   감상에 젖은 수영을 마무리하고 샤워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간지러운 기분으로 기묘한 경험을 하는 중이다.

   ···하늘을 보며 샤워를 해 본 적이 있는가. 하늘이 뻥 뚫린 욕실에서 발가벗고 샤워를 하는 기분을 최대한 자세히 묘사해 보자면, 뭔가 부끄러우면서도 압도적인 자유를 부여받은 느낌이다. 파란 하늘을 보며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늘에 구름이 없어서 ‘이 열차가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나?’ 싶다 하면, 어디서 또 구름이 하나 -휙 하고 지나간다. 엄청나게 빠른 공간에서 전신의 피부를 욕실 공기에 닿게 하여, 어디서 탄생했는지 잘 모르겠을 커다란 자유로움을 나름 즐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기분이 좋은 것은 확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원래 자유라는 것은 갑자기 주어지면 혼란스러운 법이다. 나는 자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자, 여기! 자유!’하고 건네준다면, 나는 분명 여러 고민을 하다가 자유를 포기할 것이다. 이런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어디서였지,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영제: Escape from Freedom)』라는 책인 듯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얼 생각하든 생각의 끝에는 도달할 수 없었는데, 에리히 프롬을 기억해 냈다. 광합성 열차에 승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특별한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의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하얗고 청결한 것들과 저 빛, 내 머리 위의 빛이 점점 나를 정화하고 있다. 내가 무슨 독에 중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몸에 독이 있다면 까맣게 타 버린 식빵을 씹을 때 같이 삼켜 버린 벤조피렌(Benzo[a]pyrene) 정도밖에 없다. 아무튼 긍정적인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다. 활력도 생기는 것 같고, 직원들이 아닌 누군가와 대화도 하고 싶다는 생각(조금만···, 그래도 카림은 싫다)도 든다. 광합성 열차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리쬐는 빛이 빠르게 나를 바꾸고 있다. 여기는 이런 곳이구나.

   샴푸를 사용하려고 세면도구를 살펴보고 있자니, 과거에 열차 내 생활 규칙을 제정할 때는 분명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재를 고용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샴푸와 바디클렌저를 담은 용기도 투명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용액도 투명하다. 투명하지 않은 게 눈에 보이면 강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투명한 샴푸와 바디클렌저를 구해온 것도 신기하다. 용케, 치약은 투명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심플함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은 접하기 쉽지 않다. 설마, 너무 구하기 어려워서 샴푸 공장을 세워 운영하는 것일까. 광합성 열차를 제작할 자금력 정도면 그 정도는 쉬운 편이겠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열차에 회전문을 사용한 인재도 그러하다. 문이 빙글빙글 돌지 않는다면 강한 불안감을 느꼈으리라.

   광합성 열차의 샤워부스에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기다란 샤워기가 없다. 안타까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오직 부스 천장에 달린 시스템 천장 샤워기로만 몸을 헹굴 수 있다. 벽에 붙어 있는 흰색 버튼을 누르자 샤워기에서 물이 나온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투명한 물이, 은은한 소독약품의 향기를 풍기며 내 몸에 붙어 있는 거품들을 밀어낸다. 물이 천장에서 수직으로만 떨어지기 때문에 겨드랑이나 사타구니를 헹굴 때는 불편함을 느낀다.


   몸을 말리고 방에 돌아오니 어느새 카림이 들어와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침대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가 있는 줄 몰랐을 정도로 인기척이 없었다. 하긴, 원래부터 그에게는 ‘인기척’을 발산하는 그것들은 없긴 했다.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 이외에는 볼일이 없었기에 바로 방을 나서서 식당으로 향했다. 확실히, 공복에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허기가 상당했다. 이렇게 강렬한 배고픔은 정말 오랜만이다. 집에서야 일부러 식사를 거르는 경우도 없었고, 손이 닿는 곳에는 식빵이 있었기에 -꼬르륵 소리가 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깐.

   라이언 씨가 없으면 광합성 식당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멀리서 금발의 까까머리가 반짝거리는 게 보여서 푸드코트로 향했다.

   식당의 중앙에는 오늘도 천장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 무리가 서 있었다. 이제는 도처에 있는 보스턴고사리만큼 흔한 풍경으로 보인다. 다만, 무리의 숫자가 늘어나 있는 게 신경 쓰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6명 정도였다. 지금은 12명은 되어 보인다. 다행히 식당은 매우 넓기 때문에 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들 통행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엄청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오늘도 왔구먼. 광합성 식당 음식을 먹어 줘야 영양 균형이 잡힌다고 늘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라이언 씨가 쉬고 있는 사이에는 광합성 식당을 잘 이용했다고 대답했다.

   “그래? ···. 그러면 주문은 무엇으로 하겠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내 방문이 반가운 듯 보였다. 나는 또 찹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맛볼 수 없는 요리기에, 많이 먹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이언 씨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팬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파프리카를 먹게 좋게 썰면서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다. 용케 손을 베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네···, 얼굴이 아주 좋아졌구먼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숨죽은 콩나물 같은 얼굴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조금 놀랐다. 내 내면의 변화를 감지한 그의 통찰력은 보통의 그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요 며칠 사이에 찾아왔구나. 이게 광합성 열차의 시스템이구나!

   야오린 씨와 함께한 수 시간이 인간을 이렇게 변화시켰다. 가볍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고, 카림의 태도가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건강한 마음으로 수영도 했다. 그 와중에, 어렸을 적에 수영선수였다는 사실도, 어머니에 대한 것도 기억해 냈다. 마지막으로 오묘한 기분의 샤워를 하며 에리히 프롬을 떠올리고, 끝내주게 맛있는 찹스테이크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건강하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 다양한 색을 사용해서 그 윤곽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된다. 분명, 내 머리 위의 하늘처럼 밝은색들로 가득할 것이다.

   나는 곧이어 나온 라이언 씨의 음식을 먹으며, 어제 야오린이라는 간호사를 만나서 상담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내 얼굴이 좋아 보이는 것은 분명히 그녀와의 대화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도파민이 어떻고 뭐, 그런 주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했다고 말했다.

   라이언 씨는 무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혹시, 도파민이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이해가 잘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야오린 씨가 이야기해준 주마등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트럭과 부딪히기 3초 전···.

   그때, 라이언 씨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지금··· 트럭이라고 했나?”

   나는 그의 분위기에 바짝 긴장된 채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뱉은 말을 곱씹어 봐도 말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그녀가 그 이야기를 자네에게 들려줬다는 거지···? 그럼 괜찮겠지. 자네는 곧 내릴 사람이니깐···.”

   라이언 씨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무슨 일일까.

   라이언 씨는 조리복을 벗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브레이크 타임’이 쓰인 팻말을 세웠다.

   “자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네. 지금 시간이면 그녀가 와 있을 거야.”

   나는 밥 먹다 말고 영문도 모른 채 라이언 씨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광합성 공원에 왔다. 라이언 씨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곳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야오린 씨가 공원 구석의, 해바라기가 심어진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저 기다란 포니테일을 보니 틀림없는 야오린 씨였다.

   “역시, 오늘도 해바라기에 물을 주러 왔구먼. 그녀는 매주 두 번씩 해바라기에 물을 주러 온다네. 원래 공원의 식물들은 조경전문가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저 해바라기만큼은 야오린이 돌봐 주고 있어.”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확실히, 야오린 씨의 큰 키와 가녀린 몸은 해바라기와 잘 어울렸다.

   “원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가 ‘도파민’과 ‘트럭-주마등’ 이야기를 자네에게 들려준 것을 보면, 아마 괜찮을 거야. ···그래, 그녀는 이전에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입으로는 하기 어려웠겠지. 자네는 곧 내릴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자네가 다시는 이 열차에 오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그녀도 똑같은 마음이겠지. 그래서 이야기를 해 주겠네. 광합성 열차의 직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필요가 있어.”

   나는 긴장한 채로 침묵을 지켰다. 야오린 씨가 물뿌리개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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