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수도까지 와서 호텔만 구경하다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격한 폭력 시위대만 피한다면 문제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시위대의 이동 동선을 미리 파악해둬서 여행 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가 호텔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런데 창 밖을 보니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비밀 영업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상점들이 쇼윈도를 죄다 가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차마 웃을 수 없었는데, 폭도들이 가게를 습격하고 약탈해가기 때문이라는 공통된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치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씁쓸해졌다. 역사의 현장을 생중계로 목격하며 도착한 첫 번째 투어 장소는 '달의 계곡'이었다.
@글/사진 자라나는 여행둥이
숨쉬기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고산지대도 장점을 가지고 있다. 고도가 높은만큼 중력이 약해진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각종 구기종목의 장타 신기록 달성이 가능해진다. 다이버들의 천국이 홍해라면, 라파즈는 골퍼들의 천국일지도 모른다. 라파즈에 골프를 치러 온 관광객 중에는 닐 암스트롱도 있었다고 한다. 다양한 중력의 종류를, 심지어 무중력까지도 겪어본 그는 과연 중력의 변화를 어떻게 느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쨌든 인류 최초로 달을 밟아본 적 있는 그가 달 표면과 닮았다는 이유에서 이곳을 달의 계곡이라 불렀다. 그가 이름을 불러준 뒤로 이곳은 관광명소가 되었고, 영혼의 계곡이라는 이름에서는 치를 수 없었던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데 달은 닮았을지 몰라도 사실 물 한 모금 없는 이곳은 계곡보다는 거대한 흙산에 가깝다.
@글/사진 자라나는 여행둥이
그날 우리가 목격한 달의 계곡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 입구는 방화와 화약이 터진 흔적에 신경을 곤두선 채 봉쇄되어 있었고, 입구 앞 동상은 부서져있었다. 달의 계곡은 건조해서 식물이 자라나기 어려운 곳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새싹 돋아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 건조함 만큼이나 삭막하게 훼손된 관광지를 보고 나니 작열하는 여름날 한 풀 꺾여 버린 날씨처럼 우리들의 여행 의지는 쪼그라들어버렸다.
이외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며칠 뒤 진행된 투어 장소는 마녀 시장이었다. 주술 용품이 거래되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일부 제수 용품을 판매하는 보통의 기념품 골목시장이다. 물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봐야 하는 기괴한 물품 몇 개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말린 새끼 라마, 저주용 인형 정도에 그친다.
그날 마녀 시장에서 진짜 무시무시한 건 따로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어느 상점에 양해를 구해 장소를 빌렸다. 그리고 상점에서 대기하는 인원, 시장 구경하는 인원으로 그룹을 나눠서 소수 단위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일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시장 골목 어딘가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순식간에 공기가 매워졌고 두 눈이 따가워졌다. 들숨에 고통스러웠고 날숨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골목 상점들은 일제히 셔터를 내렸다. 모두가 숨죽인 순간이었다. 외부 CCTV를 보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서 골목에는 적만만이 남아있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커플이 우리가 있던 상점 문을 연신 두드렸다. 언젠가 본 듯 한 장면이었다. 만약 남자가 강동원, 여자가 김태리였다 해도 영화 <1987>의 결말을 안다면 절대 로맨틱할 수만은 없다. 이런 초라한 무늬는 어느 역사에서나 유행하는 걸까. 참 서글프고도 아찔한 모양이었다.
@글/사진 자라나는 여행둥이
이미 고산지대인데도 15층이나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 우리의 저녁식사 장소였다. 고산병과 각자 나름의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이었지만, 그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운 뷰가 우릴 달랬다.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전에 눈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전투기가 지나갔다. 통유리창을 가득 매우며. 무거워져서 그랬던 걸까? 여행 내내 심장에 철썩 달라붙어 있던 공포감이 철렁 내려앉으며 애먼 방식으로 떨어져 나갔다.
몇 달 뒤 다시 찾아온 볼리비아 출장에서 가이드님은 손님들에게 나의 노동이 빚어낸 이 이야기를 영웅담으로 각색하여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영웅담 각색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행운을 등에 업은 안전한 여행만을 해오던 나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행운이 나를 좀 배신해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