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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K Oct 27. 2024

화장과 그림 사이

화장의 시간들

  나는 매일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세안 후 스킨, 로션을 무심히 문질러 바르고 난 후에는 아주 섬세한 작업이 시작된다. 먼저 약간의 색이 들어간 선크림을 발라 피부톤을 화사하게 하고 프라이머로 모공의 요철을 메꿔준다. 맞다. 도배할 때 쓰는 그 프라이머다.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을 벽지에 바르는 페인트와 비교하니 조금 괴리감이 있지만 원리는 다르지 않다. 화장을 오래 가게 만들어주고 피부를 좀 더 매끄럽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살면서 피부가 좋았던 적은 아기 때 빼고는 없었지만 그나마 화장을 통해 착시 효과를 느끼곤 한다.


  그다음 파운데이션으로 얼굴 전체를 팡팡 두드려 필터를 낀 것처럼 뽀얗게 기초 공사를 한다. 이때 꼼꼼하게 컨실러로 잡티들을 가려야 한다. 파운데이션을 너무 두껍게 바르면 목 부분의 색과 얼굴색이 달라 얼굴만 동동 떠 보인다. 그래서 지우개로 지우는 것처럼 컨실러로 콕콕 찍어 잡티를 가리고 파운데이션은 얇게 펴 발라 자연스러운 피부톤과 크게 다르지 않게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타고난 피부를 이길 순 없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화장이 아니라 자칫 변장이 될 수도 있어 그 차오르는 욕심을 자꾸 눌러줘야 한다.


  베이스 작업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색을 쓰기 시작한다. 눈썹 사이사이를 채워 넣듯 눈썹을 칠하고 입술은 립스틱으로 입술 중앙을 톡톡 두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입술 전체를 붉은빛으로 물들인다. 어릴 적 어머니는 급하게 나갈 일이 있으면 입술만 바르고 나가셨다. 립스틱을 바르지 않으면 아파 보이기까지 하니 립스틱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형광색 립스틱을 바르면 얼굴에 조명을 켠 것처럼 쨍해 보이는 효과까지 줄 수 있다.


  눈두덩이에 살짝 펄이 들어간 연한 섀도를 펴 바른다. 속눈썹 가까이 진한 섀도로 선을 그려 눈꼬리를 살짝 빼주고 눈에 음영을 주어 눈매를 깊고 그윽하게 만든다. 한참 화장에 열정을 부릴 때는 다이아몬드 펄(입자가 작은 반짝이 가루)을 눈 밑 애교 살에 살짝 콕 콕 찍어서 ‘눈물 효과’를 주기도 했다. ‘너 울었어?’ 소리를 왜 듣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르고 나가면 꼭 한 번은 그 소리를 들었다.


  아이라인을 처음 그리고 다닐 때는 대체 어디에 그려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적당히 눈두덩이에 가느다랗게 한 줄로 그렸더니 어느 날 친구가 살짝 말해주었다.

  

“너 아이라이너 되게 웃기게 그리고 다닌다.”


  아이라인은 속눈썹에 바짝 붙여서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화장 시작한 지 무려 1년이나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아이라인뿐이었으랴. 볼 터치를 과하게 해서 홍조 올라온 사람으로도 여러 해를 지냈다.


  볼 터치는 광대 윗부분부터 관자놀이까지 사선으로 살짝 올려 생기 있는 얼굴을 만들어준다. 예전에 배스킨라빈스 광고에서 아이스크림 소녀가 나와 귀여움으로 전 국민의 심장을 강타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 여자아이의 볼을 발그레하게 만들어준 볼 터치가 한참 유행이었다. 볼 터치만으로 어려지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을 시작으로 나의 볼에도 다양한 볼 터치 제품들이 거쳐 갔다.


  화장의 마지막 순서는 뷰러로 속눈썹을 3단계에 걸쳐 아찔하게 찝어 올린다. 그리고 마스카라를 살살 발라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더 길어지게 한다. 마스카라는 바르고 안 바르고의 차이를 대학생 때 몸소 체험한 바 있다. 술 마시고 마스카라 칠한 게 거추장스러워서 화장을 지운답시고 속눈썹을 모조리 뽑아 버린 적이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 속눈썹 없이 화장하고 다니면서 마스카라의 효과를 뼈저리게 느꼈다.  


  “매일 화장하는 거 안 귀찮아?”


  일 년에 몇 번은 으레 듣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나는 화장하는 게 귀찮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화장 지우기는 귀찮아서 어제도 미루고 미루다 새벽에 간신히 일어나서 지우고 다시 자긴 했지만. 나에게 화장은 늘 새롭다. 양 조절과 약간의 스킬에 따라 나만 느끼는 변화가 있다.


  주변 지인들이 본인 그림을 내걸고 작품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문득 나도 매일 얼굴이라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전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수파? 입체주의 화가의 반열에 끼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삶의 현장에서 늘 보던 작품이라 무심히 지나쳤던 그 작품. 매일 조금씩 달라지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그림. 삶의 흔적 그 자체로 매우 귀한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을 매일 전시하고 또 감상하고 있었다.


  예전에 ‘임산부의 화장 안 한 얼굴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린 적이 있었다. 화장이 태아에 안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서 애 낳으러 갈 때도 화장품 몇 가지를 챙긴 나였다.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씻고 집에 올 때도 얼굴은 고대로 내버려 두고 집에 와서 화장을 지웠다. 화장한 게 아까워서 못 지우는 게 아니라 화장 안 한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였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거나 안 들어하는 건 본인의 마음이다. 어떤 그림을 보고 모두 다 예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멋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귀엽게 보기도 하고, 고상하게 보기도 한다. 각자의 취향이 이토록 다양한 것을 혼자 전전긍긍하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최선을 다한 오늘의 얼굴로 하루를 자신감 있게 살아간다면 그걸로 끝이다. 이제는 임산부의 생얼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 것 같다. 그러면서도 화장기 없는 얼굴로는 집 앞 슈퍼도 안 나가는 난 모순덩어리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그림을 그린다.


*대문사진 출처: 조르주 쇠라의 <화장하는 젊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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