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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Aug 27. 2024

나비는 일광욕 중

고추를 따다 나비를 만나다

고추를 한 바구니 가득 채웠다. 배에 달린 묵직한 바구니를 비우러 마당으로 가던 중 나비를 발견했다. 그 녀석은 꼼짝 않고 바닥에 앉아 아침부터 선탠을 하고 있었다. 세상 팔자 좋게 아침부터 여유롭다 너? 해를 쬐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이유. 그건 나와 같이 그 녀석도 풀밭을 돌아다녔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밤과 낮의 경계,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 기온 차가 갑자기 커지는 때, 아침 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시점. 그 시간을 지나가는 새벽과 아침의 시간에 고추 잎이 푹 젖어 있었다. 고추를 따는 손이 젖었다. 팔뚝에 장착한 토시를 타고 이슬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건 칙칙함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빛을 막 쬐는 자에게 주는 단물 같은 시원함이었다. 먹이를 먹으러 풀숲을 헤치고 다녔다면 나비 녀석도 나와 같이 날개가 푹 젖었을 테다. 나는 팔 너는 날개. 그래서 일말의 의문 없이 나비도 날개를 말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나를 위험인물로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닌 듯하다. 젖은 날개로 날지 못하거나 날기 귀찮았는지도 모른다. 가까이 더 가까이 더더더 가까이 다가가 셔터를 눌러대도 꼼짝 않고 있는 것을 보아선 농부 아낙이라는 방해물보다 젖은 날개가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마당 바닥에 날개를 쫙 펼친 녀석의 날개를 자세히 관찰했다. 날아갈까 조심하며 살그머니 앉았다. 한쪽 날개는 누군가의 공격으로 잘라먹었는지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는지 날개 꼬리 끝 부분이 없다. 양쪽 날개가 모양이 다르면 비행에 불리할 텐데 녀석의 비행술도 궁금하다. 농부 아낙과 같이 아침 태양을 등지고 태양빛을 듬뿍 받는다. 나비의 날개야말로 태양을 전지삼아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햇빛 아래 커다랗고 우아한 그늘을 만든 날개. 완전 무장한 농부 아낙의 기다란 그림자를 겹쳐 보며 여름날 아침 마당에서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서서 볕을 쬐었다.


나는 덥고 너는 우아하다. 무방비 상태인 너. 완전 무장을 한 나. 나는 호기심이 일고 너는 위험해 보인다. 너는 나를 만나 천만다행이다. 살면서 나비 날개 하나, 잠자리 날개 하나 잡아 보지 못한 이제 막 호기심이 생겨나는 겁쟁이 관찰자의 눈에 띄어서 참 다행이다.


퍼뜩 배 앞에 달린 농사 바구니에 가득 담긴 빨간 고추의 무게가 느껴졌다. 고추를 쏟아놓고 빈 바구니로 돌아오니 나비는 날아가고 없었다. 나비는 날아갔고 농부 아낙은 고추를 따러 간다.  



나비는 선탠 중
고추 따다 나비를 만난 농부 아낙의 완전무장 그림자
배에 달린 농사 바구니에 고추가 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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