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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보나 Sep 03. 2024

다시 고추

농사일에 대한 고찰

바람은 선선해도 태양은 여전하다. 고추는 매우 빨갛다. 세 물 고추를 딴다. 덥기도 여전히 덥다. 고추가 너무하다. 태풍 한 번 없이 내리 쬐이는 태양볕에 고추가 대풍이다.


“아들 물 물 물 좀. “

“엄마 들어가서 쉬어.”

“들어가면 못 나와. ”

“왜? 못 나와? “

‘다시 나오고 싶겠냐? ‘


선선한 바람 부는 테라스에 캠핑의자 펴고 한가롭게 앉았다. 장화를 벗어던지니 발도 쉼 쉴만하였다. 얼굴 마스크도 벗고 모자도 벗고 목에 두른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을 닦고 머리에 얹었다. 머리에 덮은 젖은 수건은 지나가는 벌들의 비행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림막이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높이 떠오른 저 태양빛 아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편안한데 낮잠이나 한잠 잘까? 풀벌레가 앉아 쉬는 저 풀숲은 그늘 아래  바람이 시원하겠네. 나도 숲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아볼까. 어슴푸레한 빛이 보인다. 눈을 수건으로 덮으니 눈앞에 붉은색이 펼쳐진다. 눈을 덮어주는 얇은 피부로 벌건 한낮의 태양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두툼한 손으로 눈을 가리니 그제야 앞이 깜깜해진다.


오늘의 태양이 사라지기 전에 일어나자. 나는 주 1일 근무, 하루 농사꾼이니 꾀부릴 틈이 없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붉은 태양아 넌 참 한결같구나. 다시 나간 고추밭의 태양은 또다시 농부 아낙의 등짝을 내리쳤다. 얼굴이 들이달았지만 그럴 줄 알고 햇빛 가림용 얼굴 마스크를 귀에 걸었다. 좀 많이 치렁치렁해도 괜찮다. 난 관리하는 여자니까. 호호.



한 바구니씩 가져다 쏟아놓고 다시 발을 쭉 펴고 앉아 앉아 쉬는데 그늘이 작아진다. 햇볕이 발 근처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의자 방향을 90도 홱 틀었다. 이번에는 팔뚝 가까이 다가온다.  일하란다 얼른. 태양님께서 말씀하셨다.


의자도 고맙고 일찍 넘어간 해도 고맙다. 단지 해가 금방 져버리는 시골이라 금방 깜깜해지는 게 문제다. 해가 산을 넘어가고서야 부랴부랴 손을 바삐 움직여 본다. 어둠과 빨강의 구분이 안 될 때까지 농부 아낙은 전력질주를 했다. 두 물째가 제일 많다고 누가 그랬나. 세 물이 더 많다. 하루 종일 고추를 땄더니 허리, 다리 손바닥과 목. 온몸이 아프다.


시골에 와서 이게 무슨 생 고생일까. 평생 농사짓는 아버지를 보며, 흙내 땀내 노동에 지친 모습을 보면서, 농사는 절대 짓지 말고 살아야지 했는데. 새벽이슬 맞으며 나가셨다 달이 휘영청 뜨고 나서야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며 농사는 절대 짓지 말아야지 했는데. 쉬는 날이면 아들 딸 농토로 몰고 나가 일을 시키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데. 낫으로 벼를 베며 숙인 허리를 통통 거리며,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 어깨에 지게를 걸어 메고 볏단을 옮기고, 달밤에 진흙 뻘밭과도 같은 물논에 노란 고무장화를 신고 들어가 비닐을 활짝 펼치고 젖은 볏단을 논둑으로 옮기면서 커서 절대 농사는 짓지 말자고 했는데. 나는 왜 스스로 농사꾼이 되어 이곳에서 묵묵히 고추를 따고 있는 것일까. 노동의 가치보다 한참 모자라는 수확물에 기뻐하고 주렁주렁 달린 열매에 감탄하고, 김매고 난 후 단정한 밭을 보며 왜 뿌듯할까.


노동이란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의 여유를 버리고 밭에 나와 우습게도 한가로움을 찾는 이상한 시골살이, 농부 아낙의 전원생활의 모습이다. 노동의 가치도 나이가 들면서 바뀌는 것 같고, 여유로움이라는 가치도 살면서 변하는 것 같다. 주렁주렁 달린 참외를 나누어 먹고, 미처 따먹지 못한 맷돌 호박이 누렇고 커다랗게 변하는 걸 보며 기쁘고, 생강 키가 훌쩍 큰 것에 날마다 기분이 좋다. 황량했던 맨땅에 내가 손수 뿌린 씨앗과 작은 생명이 자라 열매가 열리는 걸 보는 것. 그것이 농사일의 기쁨일지도 모른다.


지난주와 등 모양이 다른 노린재가 고춧대에서 노닐고 있었다. 커다란 벌은 여전히 날아다니고 나비는 옆에서 펄럭이며 작은 날개 그림자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애벌레가 붙어 떨어지지 않기도 하고 커다란 개구리가 오후의 고추 그늘 아래 쉬고 있기도 하였다. 개구리는 애벌레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더워서 그랬는지 배가 불러서 그랬는지 의문이다. 볼록 튀어나온 손가락으로 고추 꼭지를 꼭 잡고 있어서 하마터면 개구리의 손가락을 가위로 자를 뻔했다. 고추를 들어다 냅다 몇 번을 던져도 뛰어 도망가기는커녕 농부 아낙은 신경도 안 쓰고 옆으로 살짝 비켜서서 딴청을 피웠다. 고추 밭에서 농부 아낙의 존재감이 이렇다. 개구리에게 무시당하는 신세.


농사일의 기쁨이란 내가 키우는 작물과 그들이 누리는 자연과 다른 동물들과 함께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머물렀던 들판에서의 수고로움은 ‘힘들다’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풀내음, 흙내음으로 남아있고 깜깜한 밤 물논에 비친 달빛의 흔들림으로 기억되고, 논두렁 끄트머리 산기슭에 어디에 걸터앉아 먹던 참으로 기억되고, 누런 가을 들판의 일렁임, 수렁 논의 거무튀튀하지만 부드러운 진흙의 느낌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고단한 날들 속에 아름다움이 속해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것이 삶의 노림수라고 해도 어쩔 도리 없다. 농사가 나의 어린 시절에게 남겨준 것은 하나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개구리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고추 밭에서 다시 고추를 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야 힘들다. 깜깜해질 때까지 고추를 따고 들어와서 농부 아낙은 외쳤다.


“나는 오늘 밥 못해! ”


농부 아낙은 당당히 외쳤다. 9시가 다 되어 밥집은 다 문을 닫았다. 난감하지만 머리를 팽글팽글 돌려 24시간 콩나물 국밥집을 생각해 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들에 나갔다. 논두렁에서 만난 초록 풀밭 가운데 벌집을 닮은 보라색 꽃은 어린 시절 뇌리에 각인이 되었다. 고난은 우리에게 늘 잘 포장된 예쁜 선물을 하나씩은 남겨주는가 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밝음과 어둠은 늘 공존한다. 내가 선택한 명암만 내가 누릴 수 있다. 밝은 곳에 설지 어두운 곳에 설지는 내가 정한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삶의 기쁨은 존재한다.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고 난 뒤에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말 달고 시원하다. 인생의 쓴맛을 보아야 단맛을 알 수 있다. 인생의 참 맛은 역시 쓴맛일까.


고추야~~~ 다시 너를 보러 가야 한다니 너는 참으로 너무하는구나. 너를 다시 볼 주말이 기다려진다. (나는 결코 다중이가 아니다.)


가을철 농촌 살이의 고단함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다. 그만큼 풍요롭고 아름답고 정겹다.


시골살이 그래도 할 텐가?


어둠의 굴레와도 같은 생의 한가운데 나는 서 있다. 고추밭 한가운데 회전의자에 앉아 나는 다음 주말에도 한가롭게 따사로운 볕을 즐길 테다.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등을 내리치는 태양을 벗 삼을 테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기쁨을 주는 자연을 벗 삼을 테다. 농부 아낙은 그래서 다음 주에도 다시 고추를 따러 간다. 구시렁거리고 투덜대면서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고 그 녀석들을 만나러 간다. 이를테면 개구리 같은 친구들이다. 녀석은 징그럽고 바보스럽고 느긋해 보이면서도 귀여웠다. 다음번에 만나면 농부 아낙은 또 꽥! 하고 소리를 지르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논두렁을 거닐며 늘 노래를 흥얼거렸다. 1월의 달이 어떻고, 2월의 달이 어떻고 그런 내용의 노래였다. 민요와 뽕짝을 섞어 놓은 듯한 노동요였을까. 삶을 느긋하게 즐기는 그 모습을 나는 참 좋아했다. 하필 그런 모습이 기억에 남을 게 뭐람.  


아버지 덕분에 제가 이런 복잡 미묘한 삶의 기쁨을 누리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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