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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주부공감 08화

주부의 공간

by 눈항아리

밖으로 나갈 문을 찾으며 또한 나는 집 안에서 내 공간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확보가 아닌 주고받기? 흥정? 재정립. 그래 재정립이다. 아이들이 크면서 주방은 내 고유의 영역이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복이의 야간 요리 현장, 남편의 볶음밥 요리 행사는 성황리에 진행 중이다. 세탁실도 가족 모두에게 개방했다. 주부가 내어준 만큼 내 공간을 확보해야 했던 것일까. 내 공간 확보를 위해 지난 2년간 꾸준히 작업을 벌였다.


우리 집에는 내 책상이 없었다. 하긴 밥만 하던 주부가 무슨 책상이 필요했겠는가. 나 스스로 책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소파도 있고, 식탁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책상은 무슨.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고. 책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 공간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혼살림을 장만하며 화장대를 안 산 것이 이제와 살짝 후회되는 이유는 그것이 주부의 유일한 전용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서 읽지도 않는 책을 전시해 두는 책장에 그렇게도 집착을 했는지도 모른다. 전면 책장에 아이들의 책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나 혼자 좋아했다. 책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내가 고집한 공간이라 애착이 간 것이다. 손이 닿지 않는 맨 위쪽에는 내 손때 묻은 책들이 꽂혀있다. 읽지 못해서 못 버린 책도 있고, 20여 년 전 학생이던 때 몸과 같이 펼쳐보던 백년옥편도 있다. 지금은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내가 앉은 왼쪽 건너편, 아이들 책장 한편을 내 책꽂이로 쓰고 있다.


아침 시간, 냄비에 김치 두루치기를 올려놓고, 밥솥 앞에서, 물을 끓이며 글로 수다를 풀어놓는다. 아침밥을 준비하며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책상을 주방 앞에 마련했기 때문이다. 밥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보며 멍 때리기를 하기도 한다.


밥솥과의 거리 30센티미터.


책상의 위치 때문에 살림과 집안일에 관한 글이 주야장천 나오는지도 모른다. 이곳에 앉아서도 나는 주방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본다면 주부의 명당자리일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책상을 바깥이 보이는 거실로 바꿔봐도 좋을 듯하다.


내 책상이 하나 더 생기면서 이제는 가족 모두 책상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의 책상은 가장 볼만하다. 온갖 것이 마구 쌓여있다. 숙제는 바닥을 기면서 하거나 침대를 굴러 다니면서 한다. 셋째의 책상은 활용도가 가정 적다. 컴퓨터에서 무엇을 찾아보거나 유튜브를 볼 때 활용한다. 책상에는 자판하나 와 마우스패드 하나가 놓여있다. 첫째 책상은 지우개 가루가 중앙을 늘 점령하고 있다. 중학생은 볼펜을 사용하는 게 아니었던가. 요즘 지우개는 가루가 많이도 나오나 보다. 책은 이것저것 정신이 없다. 막내의 책상은 보송한 털인형 2개와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편의 책상은 셋째에게 컴퓨터를 물려준 후 충전테이블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남편은 컴퓨터 자리에 모니터를 하나 놓았고 게임을 열심히 즐기고 있다.



내 책상은 주방에 있는 덕분에 반찬통이 자주 쌓인다. 갖가지 주방 용품도 의자에 쌓인다. 대파도 단골손님이 되었다. 장 봐온 물건과 박스가 기대져 있고 과자가 책 위에 줄줄이 쌓인다. 원래 물건이 가득 쌓이던 공간이었던 터라 그러려니 한다. 그리고 내 전용 공간을 사수하기 위해 열심히 치운다. 주방과 거실의 경계에 놓은 내 책상은 살림과 나의 관계를 잘 반영해 보여준다. 투쟁인 듯 투쟁 아닌 밀당인 듯 밀당 아닌 서로 알력다툼을 한다. 누가? 쌓이는 물건들끼리 그런다.


책장만 있던 책상 위에 책이 쌓이고 독서대가 생겼다. 충전케이블 핸드폰 거치대가 올라왔다. 새벽 독서를 위한 스탠드가 올라왔다. 아이패드도 올라왔다. 무선 자판도 얼마 전 키감이 좋은 것으로 바꿨다. 6개 책상 중 가장 창조적이고 활동적이고 활용이 많이 되는 책상이 내 것이라는 점은 참으로 만족스럽다.


주부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독서 삼매경이다. 아이들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또 혼자 핸드폰을 본다며 아우성이다. ‘아니야 얘들아 엄마는 독서 중이란다.’


주방에서 설거지나 밥준비를 하면서 어린아이들을 방치하다시피 내버려 두는 짧은 시간들이 생긴다. 큰 아이들 유아기의 일이다. 아이들을 온전히 봐주지 못하며 뒤돌아 서서 주방일을 할 때면 아이들한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저희들끼리 그렇게도 잘 노는데...


주방을 보며 책상에 앉아 있는 지금의 나. 내 뒷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엄마의 관심을 못 받아 아쉬워할까? 해방감을 느낄까?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거실을 뒤로하고 앉은 나에게 막내 딸아이는 가끔 푸념 섞인 말을 한다. 엄마는 내 생각은 안 하냐며. 그러면서 책을 가지고 와 내 옆에 앉는다. 등받이가 없는 긴 고무나무 의자는 둘이 앉아도 넉넉하다.


둘이 나란히 앉아 책을 읽으면 남편은 우리 뒷모습이 그렇게도 예쁘단다.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는다.


나에게도 자그마한 책상이 생겼다. 결혼 후 15년 만에 생긴 나만의 공간이다. 나 스스로 만든 주부의 전용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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