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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사용법과 사성제(四聖諦)

by 힙스터보살


누군가 독자님께 '◇◇님은 감정적이시네요'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실 것같으신지? 조심스레 예상하건데 썩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이성을 신봉하는 까닭인지, '이성적이다'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감정적이다'라는 말은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여지가 큰 것 같다. 실상 이성적이라는 말은 그저 이성적이다는 것 뿐이고, 감정적이다는 말은 그저 감정적이다는 말일 뿐이다. 그것이 좋게 혹은 나쁘게 들리는 데에는 우리의 배경지식이나 편견 또는 습관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 만물 어느 것 하나 쓸모가 없는 게 없다. 심지어 우리가 악하다, 배척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조차도 상황에 따라 쓰임이 생길 때가 있다. 하물며 감정이 쓰임이 없을리가.


이렇게 얘기해도 '감정적이다'의 쓰임을 절대적으로 불인정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그정도로 강렬하게 감정적인 상태를 배척하는 건, 그만큼 본인 스스로가 감정적인 상태가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하는 일련의 것들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insecure한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서 그러실지도 모르지. 그정도로 힘드시다면, 힘드신 것조차도 인정을 해 드려야겠지만 말이다.


여튼 감정을 언제 쓰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느냐는 질문에 이제는 어느 정도 답이 보이는 것같아서 정리를 해 본다. 오늘도 감정에 휩싸여 힘드신 분들에게 위로라도 된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사람들과 교류를 하다보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자들을 만나곤 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뽐낸다든가, 자기확신에 차 있다든가, 상대방을 공격한다든가, 필요 이상 방어적으로 군다든가 하는 사람. (이 모든 걸 한 방에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뭐 하나 두고 보기에 좋은 것들이 아니긴 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아는 걸 뽐내고 싶어한다든가,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고 싶어한다든가, 아니다 싶은 것은 공격하고 싶어한다든가 혹은 내 의견을 고집하고자 방어적이 되기도 하는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지적허영심을 뽐냈다 하여 그걸 가지고 당장 제재를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런데 또한 다들 아주 직관적으로 안다. '이 사람 선 넘는데? 이쯤되면 제재를 해야지 않나?'는 판단이 부지불식간에 역시 선다는 것도.


문제가 되는 건 '지나친 상태'이다. 유명한 사자성어로 다시 말하자면 '과유불급(過猶不及)' 지적 허영심이든, 자신감이든, 공격적이거나 혹은 방어적인 태도든 문제가 되는 건 '과다할 때'다.


하지만 '과하다'라는 표현 역시 문제가 있다. 우리가 어떤 상태를 이르러 '과다하다/부족하다'는 것은 대단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어떤 특정 기준을 두어 제제를 하는 것(예 : 누군가가 자기확신의 강도를 200만큼 했다고 또는 공격적인 단어를 10개 이상 썼다고 제제)이 설득력은 가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제제를 할 수 밖에 없는가?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감정'이 등장한다. 리사 펠드먼 바랫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감정은 뇌활동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뇌'라는 게 본래 우리 몸 전반의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기관이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레거시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문제가 생기겠다 싶으면 부정적인 정동 반응을, 뭐라도 좋다고 여기면 긍정적인 정동 반응을 보인다. 그런 정동이 구체화되고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과정에서 감정이라는 실체가 생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정'이란 우리 뇌가 판단한 뇌활동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두개골 안쪽에서 열심히 분석하고 판단내린 뇌를 존중하는 측면도 그렇고, 감정이 생기는 매커니즘을 돌아봐도 그렇고, 감정은 꽤 의미있는 정보를 알려주는 어떤 '신호'로 볼 수 있다.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은 '이건 적절하지 않다'는 뇌의 강렬한 신호 중 하나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절대적인 법칙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내 뇌가) 판단하기에 '이건 적절치 않아'라고 외친다면, 이를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많은 자기개발서들이 말하는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라는 게 이런 맥락을 지닌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상황을 접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면, 한 생각 돌이켜서 좀 진정을 하고, 문제를 명확히 꿰뚫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불자라면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하심(下心, 마음을 내려놓음)하고 또 하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뭔가 아님을 느끼고, 문제가 뭔지 명징하게 파악하고, 최적의 대안을 찾아 이를 행동으로 옮겨 문제를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 (문제파악-대안탐색-실행-문제해결)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한 게 '사성제(四聖諦)'일 뿐이다. 부처님이 완연한 깨달음을 얻으시고 설파하셨다던 '팔정도, 사성제, 연기설, 삼법인'의 그 사성제 말이다.



* 고(苦, ukkha Sacca) : 삶에서 느끼는 고통, 모든 존재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에서 생기는 현실적인 문제점들이 '고(苦)'이다. 사람은 고통을 느끼기에 문제의식을 갖게 마련이다. 글을 쓰는 것도 그렇고 변화를 촉구하는 것도 그렇고 그 시발점은 '....어?'하며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 집(集, Samudaya Sacca) : 세상의 모든 결과는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발생하고, 그 결과는 또 다시 어떠한 원인을 촉발한다. (This is 연!기!설!) 따라서 고통은 우연이 아니라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기인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꿰뚫고 (대개의 고통은 집착에서 오지요) 그 집착이 있게된 이전 원인을 거슬러 탐색하는 게 집(集, 모으다)이라 할 수 있겠다.


* 멸(滅, Nirodha Sacca) : 여기서의 멸(滅)은 '소멸한다'고 할 때 그 멸이다. 대안을 찾아 이를 실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멸(滅)의 과정인 셈. 인과를 명확히 하면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버리게 된다. 이해는 심적인 고통을 상당히 많이 완화시킨다. 안톤 체호프가 소설을 쓰며 인간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를 이해한 것과 같이 말이다. 그에게는 소설에 매진한 그 과정이 멸의 과정이었건 셈이다.


* 도(道, Magga Sacca) : 고통의 소멸 = 깨달음에 이르름 = 문제해결, Q.E.D.로 보면 되겠다. 그 실체를 완연히 알고나서 도달한 상태. 그것이 '열반(Nirvāṇa, 열반은 '닛빠나'를 소리만 비슷하게 한자로 표현한 것)'이지 싶다. 부처께서는 열반에 다다르기 위해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해야 한다고 설파하셨다.


여담이지만 '열반'을 고통의 해방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한 밴드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밴드명을 '너바나(Nirbana)'라고 지었나보다. 너바나의 대표곡이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나도 참 좋아했던 곡. 자료조사를 하다보니 알게 되었는데, 너바나는 사회적 메시지를 싣은 새로운 풍의 그룹사운드(= 얼터너티브 록)로 90년대 대중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친 밴드라고 하더라.


아이러니하게도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역시 자료조사를 통해 안 건데, 그가 평생에 걸쳐 우울증, ADHD, 조울증 및 원인 모를 위장통에에 시달렸고 한다. 처음엔 위장통을 극복하려고 약물에 손을 댔고, 이 과정에서 약물의존성이 크게 높아졌던 것같다. 사망 후 그의 몸에서 발견된 헤로인이 치사량 이상이었기도 했다고. 그가 꽤 불우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이미 자살시도 이력이 있다는 데에 마음이 아프다. 그가 바랐던 게 무엇이었을지 지레짐작도 간다. 되려 그자야 말로 (적절한 의학적 보조와 함께) 팔정도를 정득했다면 자살까지는 안 했으려나?


참 신기하다. 경영대학 다닐 때 배웠던 문제해결의 단계를, 사십 줄 가까이에 접한 불교를 통해 다시 한 번 접하게 되다니. 뭐 내가 사성제를 오해해서 엉뚱한 경영학 이론을 논하고 있다면 할 말이 없는 거긴 한데, 그래애도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이게 답인 것같다는 생각이 들긴 드는.... 혹시나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바른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분께서 즐겁게 말씀 해 주시기를 ^^!


그렇게 붓다가 말씀하신 법륜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 굴리다보면 나도 부처님처럼 완연한 깨달음(열반, 涅槃, Nirvāṇa)에 이를 수 있으려나 궁금하다. 그러한 깨달음에 다다르게 되면 어떤 기분으로 살까? 내가 부자로 살아보지를 못해서 부자가 어떤 기분으로 세상을 사는지 모르겠는 것마냥, 아직은 거기까지 깨달은 바가 없어서 모르겠다. 부자도 되고 싶은데 깨달음도 얻고 싶네? 하~ 바라는 것도 많아!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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