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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강 포레스트 검프에 대하여

by 힙스터보살


지난 포스트에서도 언급했지만, 내 인생영화 중에 하나가 <포레스트 검프>이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이 영화를 참으로 좋아한다. 나는 이 영화 못지않게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도 어음청 좋아하는데, 그 대단한 작품이 오스카상에서 빈손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작품이 이 <포레스트 검프>라고 한다.


이 영화는 검프라는 인물의 인물을 따라간 전기영화이면서 또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져있다. 이 영화를 미국의 역사를 반영한 관점으로 해석해도 재미있고, 검프라는 인물 자체의 소박함과 성실함을 기준으로 봐도 이 영화는 볼만한 가치가 있다. 뭐 그렇기에는 너무 신화적인 개인이고 판타지가 팍팍 뿌려진 내러티브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신화적 영웅담은 예나 지금이나 맛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추천영화라서 그런지 내 쇼츠에도 자주 뜬다. 쇼츠에 뜰 때마다 반갑다. 쇼츠마다 다루는 장면은 다 다르지만, 어느 장면을 다뤘든 재미지다. 전체를 다 봐도 재미있고 부분만 떼어봐도 재미있는 영화라니! 두 번 추천하고 싶다. 나중에 울 아들램 크면 옆에 끼고 같이 보고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에게 있어 '달리기'가 가지는 의미는! 영화를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ㅋㅋㅋ


영화에서 검프라는 인물은 다소 멍청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내가 바라보는 검프는 나보다 큰 인물로 느껴진다. 그렇게 보이는 데에는 필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검프 특유의 성실함이라 생각된다. 불평불만 없이 자신의 위치에서 요청받은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해 이뤄내는 자세. 그 안에는 '이걸 해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안되' 식의 집착이 없다. 그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불자의 관점으로 진짜 좋아요 백만개를 박아드리고 싶은 삶의 태도다. (어쩌면 우리가 성실하고 소박한 사람을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바라봐서 서사적 과장으로 검프를 멍청이로 보이게 했던 것은 아닐까도?)


20대 때의 나는 무엇이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불광불급(不狂不扱)이라는 말을 블로그에 달아뒀었다. 하지만 몸으로 부딪힌 세상은 나에게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답을 리턴 해줬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그렇다면 기삼이라도 챙길테다'라며 아둥바둥 살기는 했는데. 그게 생각만치 쉬운일이 아니었다. 꾸준히 성실함을 유지한다는 것, 비판적 사고를 잃지 않되 타인의 요청에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내게 의외로 어려운 일이였다. 나는 때때로 상당히 게으르고 반항적인 면을 가진 자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그 게으름과 반항심이 지극히 내 본위의 사고방식으로 비롯된다는 것은 꽤 나중에 알았다. 내 멋대로 하고프기에 게을러지고 내 멋대로 생각하기에 반발심이 생겼던 것이다. 와중에 뭔가 진보적이고 혁신적여 보이는 것을 추종하던 게 내 20대 때의 모습이기도 하다. 망아지같은 내 모습을 그래도 적당히 좋게좋게 봐주신 주변 어른분들이 있으셨는데. 그 분들 눈에 나의 철없음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지금 돌이켜 생각 해 보면 그분들의 자비심에 새삼 감사의 마음이 샘솟는다. 나 역시 당신들과 같은 아량을 갖추어 살겠노라 다짐 해 본다. (당장은 잘 안되는 것같긴 해요 ^^;;;)


재미있는 건, 본인이 기존의 질서에 반항하는 생각만으로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는 듯하다. 생각이 한참 잘못된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습에 의해 피해받는 자들에 좀 더 집중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는 그룹의 특성일 뿐이다. 보수적이라는 개념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습에 의해 호혜를 받는 자들에 더 집중하여 유지를 포커스를 맞추는 그룹의 특성을 보수적이라 할 뿐이다. (아 물론 요즘에는 보수적이라는 말이 대단히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긴 하다.)


변하지 않으려하는 가운데 변화를 품어야하는 보수주의자의 고충을 잠시 애도해본다. 고쳐야 할 게 한가득인데 요지부동한 상대방을 보며 오늘도 홧병에 시달리는 진보주의자의 고충도 함께 애도해본다. 와중에 나같은 사람을 진보주의자라고 칭하는 분이 있다. 주장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긴 한데, 주장을 하면 근거 정도는 대 줘야지? 하는 말마다 '내 말이 옳다' 태도를 진하게 풍기면 어찌 대하는 게 적절할지? 공론장에 등장하는 이런 빌런 분들 덕분에 '민주시민'은 어떻게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지만 잘 배운다. (어째 가르침을 주는 방식이 검프와는 정 반대인 것같은데?)


극단주의자가 일으킨 파문을 인해 보이는 호수의 표면이 호수가 보이는 모습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길 바랍니다.


뭐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민주주의가 가지는 다양성이 그 본연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극단성을 배양하기도 한다. 그래서 공론장은 때때로 격렬한 논쟁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 격렬함이 지나쳐서 사람들이 정치에 피로감을 느끼고 정치에서 눈을 돌리기도 한다. 딱 대한민국이 지나쳐오고 있는 세태가 이러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조금 멀리보자면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이 민주주의가 굴러가는 큰 사이클인 것같다.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자연히 굴러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처럼.


해서 이런 지지고 볶는 세상사에서 개인은 '존버'할 필요가 있다. 사실 어떤 기회를 딱 마주치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은 대단히 존버스러운 면이 많다. 자꾸 존버존버하니까 비하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기에 표현을 달리하자면 '성실하게 살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성실함은 어떻게 이룩해낼 수 있을까 자문 해 본다. 단지 개인적인 동기만으로 성실함을 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고. '동기'가 끌어내는 에너지는 단기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더러워도 좀 참고 그려려니 할 수 있는 인내심과 유연함이 성실함의 재료이지 않나 싶다. 검프의 성실함에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


인내심과 유연함이 결합된 인간은 필히 어질다. 어진(仁)사람을 지향한 유가는 군자(君者)와 소인(小人)을 참 많이도 비교하더라. 군자(君者)를 달리 말하면 '된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지금 내 N사 블로그 자기소개라는에는 이 말이 달려있다 : "인자무적(仁者無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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